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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탈(면, 가면), 탈놀이(가면희), 탈춤(가면극) 등이 가끔 목격된다. 형태와 표현 방법은 달라도 탈문화의 보편성을 감지할 수 있다. 문화적 보편성과 더불어 한국은 탈문화의 특수성을 지녔다. 세계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풍부한 문화적 특징을 지닌 한국의 탈춤이 세계문화유산으 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탈춤의 시원을 찾아서
변장술에서 시작한 고대 탈문화와 유물
오늘날에도 탈문화는 조형예술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살아 있 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문화사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다. 지금도 자신의 몸을 위장한 채 사냥을 일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고 기를 잡았던 사람들은 어부 직업으로 독립했다. 철로 만든 화살이나 작 살을 사용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변장술을 이용해 동물과 아주 가까운 거 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 수렵채집용 탈(사냥면) 이다. 부족이 숭배하는 대상을 위해 만든 신앙용 탈(신가면), 공포의 대 상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퇴치용 탈(벽사면), 각종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진혼용 탈(영혼면) 등도 철기시대 이전에 나타났다. 한국의 탈문화와 관련된 유물은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구석기시대 유물은 충청북도의 단양과 청원, 강원의 양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신석 기시대 유물은 부산의 영도,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북한지역인 웅기군 서 포항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경상남도 울주군의 천 전리와 대곡리에 있는 대형의 바위그림에서 확인되었다. 천전리에는 사 람의 형상과 얼굴도형의 탈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대곡리에는 춤을 추는 사람의 모습, 벌거벗은 듯한 사람의 모습, 화살을 갖고 사냥하는 모습 등 이 보이고, 얼굴도형도 2개가 있다. 탈의 형상은 천전리의 것과 비슷하다.
생산적인 의례에서 원시축제로 발전한 탈춤
청동기시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자연환경과 날씨, 노동력과 정 치였다. 신앙의 대상인 신과 의례를 주도하는 샤먼, 마을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희자들과 조직을 지도하는 통치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자연과의 갈등을 다스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샤먼의 사회적 역할은 이 시대에 절대적인 지위였다. 바위그림에 남아 있는 방패형 탈의 모습을 신의 얼굴 또는 샤먼의 존재로 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고대 성읍국가시대 사냥굿(산영굿 다), 풍어굿, 서낭굿은 가능한 많은 수확을 기원했던 점에서 생산적인 의례였다. 마을을 단위로 해서 집단 행동을 한다는 의미에서 마을굿이라고도 했다. 제물이 되기 위해 죽어 야 하는 대상에게는 희생제를 올려줌으로써 생명의 존귀성을 새삼 인식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제물은 일종의 공희(供犧 sacrifice)라 할 수 있다. 제단에 올려진 제물은 신이 먹던 음식이므로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아 울러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함께 제물을 나누어 먹고, 함께 노 래하고 탈을 쓰고 춤을 추어 공동체의식을 다지게 된 것이 원시축제로 발전했다.
탈춤과 탈놀이의 차이
공연예술의 발전 논리로 보면, 탈을 도구로 하는 제의 및 단순한 민속놀음 으로부터 탈춤으로 통칭되는 예술적인 공연들이 성숙되어 온 것이다. 기 록에 의하면, 탈 자체를 신체(神體)와 동일하게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민 속신앙도 지속되었다. 1932년 10월에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북한지역 인 개성의 덕물산에 있던 최영장군사당에서 탈을 숭배하는 신앙이 지속 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사당 가운데 탈을 신체(神體)로 모시는 당을 창 부당(倡夫堂), 그 벽에 봉안된 탈을 수광대(首廣大)라 했다. 창부와 광대 는 모두 연행자(샤먼 및 배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탈을 도구로 하는 단순한 민속놀음이나 샤먼굿들도 상당수가 전승되었 다. 오늘날 공연되는 탈춤과 가면희라 통칭되던 탈놀이들은 예술적 성숙 도에 차이가 드러난다. 제주도의 입춘굿놀음, 김해의 춘경제, 양주의 소 놀이굿, 평산의 소놀이굿, 영산의 나무쇠싸움 등에는 나무나 민속생활 도구들을 응용해 만든 ‘소의 탈’이 행사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북한에서 전승되었던 사자놀음에서 사자는 호랑이나 고양이 모습을 한 형태, 귀신 의 형상을 나타낸 형태, 용비늘이 얼굴에 달린 사자의 형태 등 세 가지 종 류가 전승되었다. 동해안에는 호랑이탈을 쓴 범굿이 전승되고, 무안에 서는 용과 호랑이를 나타내는 여의주와 금양탈(金羊탈)을 도구로 하는 마을사람들의 경쟁적인 싸움놀이가 연행되었다. 이것은 모두 탈을 도구 로 하는 탈놀이에 해당한다.
기원론에 관한 학계의 관점
학계에서는 탈춤의 기원으로 이상에서 말한 서낭굿탈춤 이외에 기악기 원설, 산악백희기원설, 산대희기원설 등이 논의되었다. 이러한 기원설 은 학자들의 일정한 연구방법을 전제로 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일면, 대상이 되는 연희들이 각기 시차를 두고 수용·연행되었고, 후대 로 오면서 서로 복합적으로 탈춤 발전에 응용되었다는 점에서, 기원설로 서 한계를 지닌다. 서낭굿기원설은 고대의 서낭신(농신)을 위한 축제에서 탈춤이 비롯되었다 는 해석이다. 기악기원설은 불교공연예술인 기악의 수용, 그 일종인 탈춤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산악백희기원설은 실크로드와 중국에서 유입 된 다양한 공연예술이 산악백희이고, 그 일종인 탈춤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 해석하고 있다. 산대희기원설은 삼국시대에 산대희가 시작되었는데, 이런 공연이 대륙의 영향도 함께 받으면서 조선시대까지 세련된 산대탈춤 으로 발전했다고 해석한다. 학자들의 이 같은 다양한 해석은 한국 탈춤의 본질적·예술적 연구에 크게 기여한 업적인 만큼, 쉽사리 지나칠 수 없다.
‘처용가’에서 탈춤의 발전을 읽다
『삼국유사』 중 ‘처용가’에 기록된 상심무설화는 서낭굿에서 탈춤이 발생 하는 과정을 추론케 한다. 상심(祥審, 象審)은 산신에서 비롯된 것이고, 헌강왕이 산신춤을 모방해 춤을 추었으므로 ‘왕이 추었던 상심무’라는 이 야기가 전하게 되었다는 내력이다. 그런데 상심은 ‘구렛나루 수염이 달 린 노인의 춤’으로서 상염무(霜髥舞)라 부르기도 했다. 산신을 상징하는 노인의 탈을 쓴 샤먼이 추었던 춤이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은 탈춤의 발전과 깊은 상관성이 드러난다. 처 용 일행은 헌강왕 앞에 나타나 즐거운 춤을 추며 감사를 나타냈다. 한편, 악귀를 물리치는 춤을 처용무라 하는데,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 전 승되었다.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하면, 처용 일행은 고대의 비나리패로 해석된다. 비나리패는 민중의 억울함과 소망을 빌어주고, 불행을 가져 오는 악귀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며 유랑했던 배우집단을 일컫는다. 왕 은 처용을 데리고 와서 궁성에서 함께 지냈는데, 이것은 광대(중국식 주 유)의 시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강릉 단오제와 하회 별신굿놀이로 보는 서낭굿탈춤의 시원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강원도 고성에는 신성한 탈과 탈놀 이를 연행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매년 12월 그믐에 서낭제를 올리 면 신이 마을에 내려오는데 신이 내린 사람(신주, 그해의 당주, 관리)은 서당에 만들어둔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관아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 을 내렸고, 집집마다 신을 맞이해 새로운 소망을 기원했다. 이런 놀이는 이듬해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고, 그 신(탈)은 다시 사당에 모셨다. 서낭굿탈춤의 시원을 유추하는데 가장 유력한 증거는 오랜 세월 연행되 어 온 강릉의 단오제와 1960년대 후반에 복원된 하회의 별신굿놀이를 들 수 있다. 강릉 단오제는 풍농기원형(豐農祈願型) 축제의 하나로 오랜 세 월 전승된 축제이니만큼 무속, 불교, 유교 의례가 복합되고, 대규모의 시 장이 개설되며, 각종 공연이 사방에서 동시에 실연되는, 말 그대로 거대 한 축제판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전승되는 하회별신굿탈춤은 서낭굿 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고려시대 중엽에 현재와 유사한 탈춤으로 발전된 것으로 해석된다.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면은 제작연대를 11, 12세 기까지 소급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마을의 절이 소실된 후 다락에 보관 했던 목궤와 그 속에 넣어둔 탈만 남았다. 강릉과 하회에서 희생과 부활이라는 신화적 화소(motif)와 갈등의 모티 프(motive)는 탈춤의 원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강릉과 하회에서는 지 금도 여신(女神)의 존재가 신화의 중심이다. 고대 서낭굿축제에서 연행 되었던 탈춤들이 시대와 더불어 변모되고, 18세기부터 전국에 상업도시 가 형성됨으로써 전파와 교류가 빈번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의 탈춤 들이 유사한 화소와 극적인 동기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으로 해석할 수 있다.
01_사냥굿 (국립민속박물관)
02_강릉단오제
03_서낭굿
04_하회별신굿
"탈을 도구로 하는 단순한 민속놀음이나 샤먼굿들도 상당수가 전승되었다. 오늘날 공연되는 탈춤과 가면희라 통칭되던 탈놀이들은 예술적 성숙도에 차이가 드러난다."
- 글.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