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옛 선비의 위대한 가르침이 나무의 전설로 살아남아
- 신라 최치원의 전설 담긴 합천 해인사 전나무,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떠나도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세월을 타고 자란다. 비운에 빠진 고국의 운명을 바꾸고자 했던 최치원은 개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해인사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시작하고, 마음 쉴 곳을 표시해 두던 그의 지팡이는 세월이 지나 옹골찬 전나무가 되었다. 속세로부터 완전한 고립을 꿈꾸며 해인사를 떠나 쌍계사로 향하던 그가 다리쉼을 하며 너럭바위 옆 개울가에 꽂아둔 지팡이는 천년이 지나 한 그루의 커다란 푸조나무로 우뚝 섰다.
개혁을 꿈꿨던 스물여덟 살의 청춘, 그리고 은둔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57년(헌안왕 1년)에 태어난 최치원은 어린 시절 부터 당나라에서 갖가지 벼슬을 두루 거치며,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 다. 특히 당시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를 토벌하기 위해 쓴 ‘토 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그의 대표적 명문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 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 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로 시작하는 토황소격문은 “세상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까지도 몰래 베어 죽이려고 의논하리라”고 엄포를 놓는가 하면, “귀순하면 영화롭게 되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라며 회유하기도 했다. 난을 일으킨 황소가 최치원의 격문을 읽다가 놀라서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때 당나라에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붓이다”라 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최치원이 고국으로 돌아온 885년, 신라 헌강왕 때의 그는 스물여덟 살 의 피 끓는 청춘이었다. 의욕은 충만했고 헌강왕의 그에 대한 신뢰도 깊 었다. 그러나 귀국하여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이듬해 여름에 헌강왕이 죽자, 헌강왕의 반대 세력들은 최치원을 지방 외직으로 내몰았다. 최치 원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쫓겨나고 말았다. 얼마 뒤 신라는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가의 창고가 텅 빌 정도로 재 정은 궁핍해졌고, 농민은 사방에서 봉기했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지방 외직을 전전하면서도 개혁에 대한 의욕을 접지 않았던 젊은 최치원 은 구체적 개혁안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 렸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책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골품제도의 그 늘에 안주하던 성골과 진골 출신의 귀족들은 육두품의 최치원이 올린 개 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번번이 의지가 꺾인 최치원은 차츰 현실정치와 세상사에 염증을 느끼고 은둔을 결심했다. 풍운아 최치원이 마흔을 넘긴 때였다. 경남 가야산으 로 들어간 뒤 그의 행적은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천하를 방랑하다가 객사했다고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됐다는 이 야기만 떠돌 뿐이다.
편히 쉴 곳을 상징하던 지팡이가 전나무가 되다
사람은 그렇게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그가 은둔 생활 중에 손 수 심었다고 알려진 두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았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 은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그 가운데 한 그루는 2012년 천연기념물 제 541호로 지정된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다. 최치원의 자취로 살아남 은 이 전나무는 그러나 지난 2019년 9월 태풍 ‘링링’의 습격으로 줄기가 동강나고 쓰러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학사대는 합천 가야산 해인사 경내의 서쪽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청화당 뒤편의 낮은 둔덕을 가리킨다. 최치원이 비운에 빠진 고국의 운명을 서 러워하며 거문고를 뜯으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최치원은 학사대에 자 신이 편히 쉴 곳의 표시로 지팡이를 꽂았다. 해인사 요사에서 밤을 보낸 최치원은 동이 트면 하릴없이 학사대에 나와 거문고를 뜯으며 우울한 마 음을 달랬다. 세월이 흘러 최치원의 지팡이에서는 싹이 텄다.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더 지난 지금까지 쑥쑥 자라나 하늘을 찌를 듯 높지거니 솟아올랐다. 한 그루의 융융한 전나무다. 학사대 전나무는 전형적인 전나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대개의 전 나무가 곧은 줄기 하나로 우뚝 솟아오르는 것과는 달리 이 전나무는 5미 터쯤 솟아오른 뒤 줄기가 둘로 갈라졌다. 한 줄기는 곧게 자랐지만, 다른 한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다가 다시 하늘로 곧게 솟구쳤다. 아래쪽을 가 리고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두 그루의 전나무로 보인다. 긴 세월을 살아 오는 동안 중심이 되었던 줄기는 부러지고 부러진 줄기 위에 두 개의 새 로운 줄기가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줄기가 둘로 갈라지기 전 사람 가슴 높이쯤에서 잰 줄기의 둘레는 5.5미터에 이른다. 이 굵기는 우리나라 전 나무 중에서 가장 두꺼운 것이다. 줄기의 굵기에 비하면 키는 작은 편으 로 19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작지만 옹골차게 느껴지는 것은 키에 비해 다부진 근육질로 굵어진 줄기 때문이지 싶다. 최치원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대로라면 천 살이 훨씬 넘은 나무로
해동으로 돌아올 즈음에
눈 들어 물결 너머 안개 자욱한 곳 바라보니
새벽 까마귀 날아가는 저기가 내 고향이다
이제 머리카락 세는 나그네 시름 관두고
활짝 웃을 일들이 훨씬 많은 행색 되리라
모래톱에 밀려온 물결은 꽃 되어 절벽에 닿고
구름은 잎사귀 되어 바위산 봉우리 가렸다.
바삐 오가는 ‘치이자’에게 말 한마디 던진다
“그 누가 천금으로 여유로움을 사겠는가”
- 최치원(崔致遠)
신라시대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17년 동안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올 때, 신라
가까이에 닿은 감회를 담은 칠언율시(七言律詩)
1) 7행의 치이자 는 중국의 춘추시대 때, 무역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은 상인의 이름
02_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의 살아있던 때의 위풍당당한 모습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전나무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모든 나 무를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된 몇 그루의 나무 가운데 한 그루로 봐야 한 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자라는 전나무의 자람을 바탕으로 보면 학사대 전나무의 나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전나무를 최치원이 심었던 나무의 손자뻘 되는 나무 아니겠느냐는 짐작이 나오게 된 까닭이 다. 그러나 한자리에서 대를 이어 나무의 후계목이 자라났다는 이야기 역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 자리, 이 나무가 은둔한 선비 최치원의 삶을 상징하는 나무였다는 의미만 남았다. 그나마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 고 쓰러지는 바람에 얼마 전의 특별한 위용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돼 안타 까울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여기서 잠시 접어두자. 어차피 나무도 살아있는 생명인 이상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니까.
세이암(洗耳岩) 개울가에 꽂은 지팡이, 푸조나무로 우뚝 서다
다행스럽게도 최치원이 이 땅에서 마지막 흔적으로 남긴 또 하나의 나 무가 있다. 해인사에 은거했지만 세상 소식으로부터 귀를 막을 수는 없 었던 최치원은 사람을 아예 만날 수 없는 지리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하 동 쌍계사 옆을 흐르는 화개천을 따라 걷다가 개울가의 커다란 너럭바위 에 이르러 잠시 다리쉼을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그는 계곡 사이로 내다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골짜기 깊숙이 들기로 작정했다. 그러고는 속세의 이야기들로 더러워진 귀를 씻은 뒤 해인사에서부터 짚고 온 지팡이를 개 울가에 꽂았다. 자신을 따르던 시종들을 그 자리에서 물리치면서 그는 “이 지팡이가 나무로 살아 자라나면 자신도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이고, 나무가 죽으면 자신도 죽은 것으로 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쌍계사의 유명한 벚꽃 길을 지나면 칠불사(七佛寺)와 대성골 쪽으로 가 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개울가 삼거리가 바로 최치원이 세속과 마지막 이별례를 치른 곳이다. 그가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는 개울가의 너럭바위 를 뒤에 남은 사람들은 세이암(洗耳岩)이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그가 꽂 아놓은 지팡이를 바라보며 그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얼마 뒤 신기하게 도 최치원의 지팡이에서는 초록의 새싹이 돋아났다. 그로부터 천년에 걸 쳐 지팡이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서 한 그루의 커다란 푸조나무로 우뚝 섰다. 최치원이 귀를 씻은 너럭바위 앞을 흐르는 개울 건너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가 그 나무다. 경상남도 기념 물 제123호다.
03_ 최치원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담은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 04_ 벚꽃길로 유명한 하동 화개로 길가에서 천년의 세월을 노래하는 푸조나무의 위용 05_ 나무 바로 곁에 있던 가게를 철거하고 풍치를 돋우는 정자를 나무 곁에 세웠다.
나무와 그의 전설에 담긴 사람살이의 가르침
푸조나무는 이름은 이국적이나, 남부지방에서 잘 자라는 우리 토종나무 로, 가지가 넓게 퍼져서 느티나무처럼 정자나무로 많이 심어 키운다. 주 로 따뜻한 바닷가에서 자라는 까닭에 중부 내륙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범왕리와 같은 내륙의 산중에서 크게 자란 푸조나무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의 중심 줄기는 튼실하게 버티고 있지만, 세월의 풍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개의 굵은 줄기가 부러져나갔다. 그러나 키 25미터, 가슴높이 줄기 둘레 6.25미터나 되는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 는 여전히 늠름한 생김새를 갖췄을 뿐 아니라 싱그러운 푸른 잎을 무성 하게 돋아낼 만큼 건강한 편이다. 높이로는 우리나라의 푸조나무 가운데 으뜸이다.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와 마찬가지로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도 최치 원의 지팡이에서 싹이 터 자랐다는 전설을 갖고 있으니, 두 나무 모두 천 살을 넘긴 나무여야 한다. 그러나 학사대 전나무가 그랬듯이 범왕리 푸 조나무도 아무리 높게 보아야 사백 살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것처럼 전설 속의 나이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전설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은유이고 상 징일 뿐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용맹한 자람을 보고 선조의 위대함을 떠 올렸고, 그의 위대한 가르침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나무에 기대어 은유 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무와 그의 전설에는 사람살이의 중요한 가르침이 담긴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터무니없어 보이는 나무의 전설에 귀를 기 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05_ 나무 바로 곁에 있던 가게를 철거하고 풍치를 돋우는 정자를 나무 곁에 세웠다.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