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가깝지만 잊고 지낸 섬 강화도를 찾아
고려와 조선시대 1천여 년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국방 요충지이자 임시수도 가 운데 하나로서 그 지리적 특성에 빗대 ‘심도(沁都)’라 불리기도 했던 강화도. 몽 골과의 강화조약 체결지이기도 했던 연미정을 비롯하여 구한말 서세동점의 역 사적 대변혁기를 홀로 경험한 여러 진지와 고려궁지 및 외규장각, 그리고 일본 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지인 연무당 터 등 침략의 역사로 점철된 처절한 땅으로 알려져 있는 섬이다. 하지만 강화도는 폭력의 역사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낳기 위해 노력해온 흔적들을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쓴 이를 품어준 강화
강화 읍내 남동쪽 골목 안에 자리한 대명헌은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 김 주경의 원래 집터 일대에 1928년 강화의 부농 황국현이 새로 지은 집으 로 알려져 있다. 애초 사랑채와 문간채, 별당, 곳간 등으로 구성돼 있었 으나 지금은 본채와 문간채 정도만 남아 있다. 집을 둘러보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다는 등 영락없는 근대식 한옥이나, 마룻바닥은 영 국 등에서 유행하던 헤링본 형태로 짜여 있고 유리창에는 에칭 기법을 이용해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대들보와 서까래는 백두산에서 벌목 한 잣나무를 구해 올렸고, 창틀과 마루도 하나하나 짜 맞춰 지었다고 한 다. 당시 황국현의 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 부를 자 신들만을 위해 이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황국현의 첫째 사위인 김근호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중심이 되어 세운 배재학당의 이사장을 지내는 등 황씨 집안은 청년교육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집의 내력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마당 한쪽에 안내판 형태로 만들어 세워둔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이채롭다. 지난 1947년 이곳을 찾은 백 범 김구와 일행 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의 강화도 방문은 당시 신문 1면에 “인천축항의 노역죄인 김구, 지금은 건국도상의 거인 김구 주석”이라는 기사로 대서특필 됐을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향후 김구로 이름을 바꾸는 스물한 살의 김창수가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을미사변의 보복 차원에서 한 일본 인을 죽이는 이른바 ‘치하포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를 한 일이 있다. 그때 그의 구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이가 바로 김주경이었다. 다만 구명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주경은 김창수 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지어 보냈고, 김창수는 1898년 탈옥을 감행 한다. 그가 탈옥 뒤 가장 먼저 찾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위해 애써 준 김주경의 활동 공간 강화도였다. 그러나 둘은 재회하지 못했다. 김주경이 일경의 눈을 피해 블라디보스 토크로 거처를 옮긴 뒤였던 탓이다. 결국 김창수는 김주경의 동생인 김 진경의 집에서 약 석 달간 머물며 독립운동가 유완무를 만나 이름을 김 창수에서 김구로 바꾸고 중국행을 택하게 된다. 그랬던 김구가 광복 후 귀국해 가장 먼저 수소문한 사람 가운데 하나도 김주경이었다. 실제로 1947년 김주경이 살던 곳을 찾았으나 역시 그를 만나지 못한 채 그의 집 터 근방에서 찍은 것이 지금 대명헌 마당에 서 있는 그 사진이다. 일본인을 죽인 조선인을 위해 구명에 나선다는 것은 본인의 안위마저 염 려해야 하는 차원의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주경을 비롯한 강화의 인물들이 김구 구명에 그렇게 전력했던 까닭은 뚜렷했다. 한반도에서 가 장 먼저 개항장으로 열린 당시의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항 일대의 객주들 은 일본인 등 외래 상인들로부터 상권을 보호하고자 1885년 인천객주상 회를 조직하거나 ‘일본화폐 수취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저항에 앞선 이들 이기도 했다. 더욱이 조선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육박해오는 일본과 일 본인에 대한 반감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먼저 개항된 이곳 사람들의 의기 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들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보복을 하고자 했던 김구의 의기는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 출신의 의병활 동가와 독립운동가의 수가 단위 면적이나 인구 등을 고려할 때 타지역을 능가하는 이유다. 일반적으로는 고려왕조 시절 몽골에 대한 최후의 저항지로서의 임시수 도, 그리고 지난 1876년 조선 멸망의 시발점과도 같았던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의 현장으로서의 강화도에 대한 이미지가 깊이 각인돼 있 는 섬 강화도.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반대의 모습도 상존한다. 폭력적이 며 역사의 일방적인 흐름에 낙담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고군분 투한 이들을 낳고 또 보듬어준, 마치 민족해방운동의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한 곳 역시 강화도였다.
01_1947년 이곳을 찾은 백범 김구와 일행 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사진
02_독립운동가 김주경의 집터 일대에 1928년 강화의 부농 황국현이 지은 대명
03_뼈아픈 역사의 잔상, 성공회 강화성당 범종
04_김구의 인천 방문을 대서특필한 대중일보
05_ 강화성당 천주성전
계단난간과 종이, 오래돼 보이지 않은 이유
대명헌에서 북쪽으로 7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공회 강화성당도 우리들의 시야각을 좀 더 넓게 확장시켜준다. 대명헌과 고려궁지 사이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이 건물은 영국성공회가 1900년경 조선에 첫 발을 디디며 250명 정도의 신자가 들어갈 수 있는 40칸 규모의 한옥 형태 로 지은 건물로서, 한반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이다. 외관은 당시 조선의 사정에 잘 어우러지기 위해 한옥의 구조를 하고 있 고, 내부에 있는 세례대에는 ‘重生之泉(중생지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샘)’과 ‘修己洗心去惡作善(수기세심거악작선; 스스로 수양하고 마음을 닦으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외래 종 교가 이질적인 사회에 스며들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의 조심스러움으 로 읽혀진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더 눈을 끄는 게 있으니 바로 강화성당을 오르는 돌계단 양쪽의 난간과 1900년 건립한 성공회성당에 다소 걸맞지 않게 상대적으로 세월의 때가 타지 않은 듯한 종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40년대 초반, 일본은 국민총동원령과 더 불어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일반 가정에서까지 금속을 공출하기 시작 하는데 영국인들이 만든 성공회 강화성당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계 단의 철제 난간과 종이 이때 뜯겨 나갔다. 이 공간에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0년이었다. 일 본에 의한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이자 강화성당을 완공한 지 110주년 이 되는 해를 맞아 일본성공회와 신도들이 나서서 ‘과거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을 참회하고,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 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계단 난간과 종을 복원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이에 대한성공회는 “지난 과거의 과오를 참회하고 평화를 향한 교회의 영원한 사명을 역사 속에서 실천한 일본 성공회의 용기에 감사와 연대의 뜻을 표한다”며, 광복 뒤 60여 년이 넘도록 시시때때로 갈등이 표면화되 었던 양국 간의 교류사에 있어 새로운 획을 그었다.
인기 있는 여행지 그 이면
근래에 카페 겸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옛 조양방직도 눈여겨볼 만하다. 조양방직은 애초 지난 1933년 지주 집안의 홍재묵·홍재용 형제가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방직공장으로 1958년 폐업할 때까지 강화도 직물 산업 의 최일선을 담당했던 곳이다. 한창때 강화도에는 조양방직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60곳이 넘었고 직원이 4천 명을 넘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직 물산업의 중심지가 대구로 옮겨지며 강화도의 방직공장들은 하나둘 문 을 닫게 되었는데, 조양방직은 화재사건 등을 겪으며 조금 앞서 1958년 문을 닫고 말았다. 거기에 새로운 숨이 불어 넣어진 것은 지난 2017년경이었다. 산업 현장 을 새로이 인식하려는 인식의 전환 속에서 전시공간 겸 카페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특히 조양방직은 방직공장 시 절의 직조기와 같은 기계설비를 비롯하여 작업대 등을 없애지 않고 테이 블과 장식요소 등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요즈음 유행하는 이른바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얻고 있다.하지만 조양방직이 사람들 사이 에서 소위 핫한 여행지로 떠올랐기에 방문해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 양방직은 대지주가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넘어 근대적인 산업 자본으로 변모해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독특한 단 면을 집대성해놓은 역사책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양방직을 설립한 홍씨 집안은 재해 등이 발생하면 의연금이나 동정금이란 명목으로 사재를 헐어 구휼사업에 나섰기에, 소작농을 비롯 한 서민대중의 입장에서는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닌 함께하는 이 들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산업자본의 형성과정 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우리가 길을 걷는 이유
대명헌을 둘러싸고 김구와 김주경, 그리고 황씨 집안이 어우러진 이야 기, 성공회 강화성당 돌계단과 종에 녹아 있는 섬세한 배려와 화해의 제 스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카페 조양방직 이면의 한 번쯤 곱씹어봐야 할 이야기들… 우리가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돌아보는 이유가 단순히 책에서 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거의 대부분 사람의 머릿속에 대몽 항쟁의 현장으로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강화도조약 등 쇠락하 는 조선의 모습을 응축하고 있는 섬 정도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 강화도 이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다 아는 듯했지만 정작 그 속살의 이야기까 지는 다가가보지 못했던 섬 강화도를 찾아 우리들의 인식지평을 조금 더 넓혀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조양방직은 방직공장 시절의 직조기와 같은 기계설비를 비롯하여 작업대 등을 없애지 않고 테이블과 장식요소 등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요즈음 유행하는 이른바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얻고 있다."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