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글. 허주희
사진. 안호성글
스마트폰으로 QR 을 스캔하면 취재 동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평생 ‘옹기’에 전통의
한평생 ‘옹기’에 전통의
예로부터 우리의 장류, 김치 등의 발효식품과 곡식을 저장해온 옹기. 우리의 전통 생활 용기로 쓰였던 옹기는 세월 이 흐르고 식생활이 변화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직까지 전통 방식을 고집하며 한평생 옹기를 만들어 온 장 인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김일만 선생이다. 1월 중순,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에 위치한 옹기 작업 장을 찾았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경기도 여주에 들어서니 평화로 운 시골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작은 도로를 지나 니 금세 여주시 금사면 궁리, 김일만 옹기장의 작업 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거대한 규모의 ‘가마’다. 이곳의 가마는 ‘이포리 옹기가마’로 경기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돼 있다. 가마 터 맞은편에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니 김일만 옹 기장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실내에는 가마에 들 어가기 전의 옹기들이 빼곡히 진열돼 있는데, 그 모 습이 장관이다. 정교하게 빚은 예술품처럼 같은 모양 의 옹기들이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 진다. 작업실에는 김일만 옹기장과 장남 김성호 씨, 장손인 쌍둥이 형제 김명훈·김명진 씨가 있다. 할아 버지에 이어, 아버지, 그리고 30대 아들, 이렇게 3대 가 나란히 옹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옹기장 할아버지와 아들 4형제, 손자들, 기업 이어가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가 된 김일만 옹기장은 숙명처럼 옹기 일을 시작했 다. 옹기 제작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 이다. 역시 옹기 일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김 일만 옹기장은 15살 때부터 옹기 일을 배우기 시작했 다. 18살 때 경기도 여주에 온 후, 물레질을 본격적으 로 하면서 대장(옹기를 만들거나 굽는 일을 하는 사 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올해 여든 살이 된 김일만 옹기장은 “예전에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지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먹고 사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고 하면서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정말 감사한 마음”
"전통 방식으로 만들려면 바닥부터 손수 쌓아 올려 가마에 4~5일 구워야 하는데, 장작으로 일정한 화력을 유지해야 하니 옹기장이 종일 가마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그래도 전통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래야 옹기가 숨을 쉰다는 겁니다. 공기는 오갈 수 있으나 물은 통과하지 못하는 옹기 구멍은 기계로는 절대 못 만들지요."
옹기(甕器)
‘옹’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다.
옹기는 포괄적으로
황갈색의 유약을 입힌
질그릇을 총칭하며,
옹기는 상고시대부터
제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라고 말했다. 특히 “아들 4명과 손자들이 함께 하 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옹기 작업을 이어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일만 옹기장은 이곳 여주 시 금사면에서 발로 돌리는 물레와 장작으로 불 떼는 가마 등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만들고 있다. 그 옆에서 4명의 아들과 손자들이 가업을 잇고 있다. 이곳은 아버지와 아들 4형제가 함께 옹기를 만든다 하 여 ‘오부자 옹기’로 불리고 있다.
우리의 전통 생활용기였던 옹기, 수요 많이 줄어들어
옹기(甕器)에서 ‘옹’은 ‘독’이라는 우리말의 한자어로 그릇의 형태를 일컫는다. 옹기는 포괄적으로 황갈색 의 유약을 입힌 질그릇을 총칭하며, 상고시대부터 제 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옹기장 (甕器匠)’은 독과 항아리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옹 기는 예로부터 가정마다 음식물의 저장 및 발효용구 로 흔하게 사용했지만 차츰 다양한 식기가 나오고 아 파트 문화와 주방의 현대화 등으로 그 수요가 많이 줄 었다. 김일만 옹기장은 “옹기장은 옛날에 쌍놈이라 불릴 정 도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서 농촌에서도 떨어져 살 았다.”면서 “예전에 옹기를 만들면서 생계조차 잇기 어렵고 괄시도 많이 받았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가족들 입에 풀 칠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옹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김일만 옹기장은 “지금은 형편이 나아졌고 무엇보다 차별이 없어서 세상이 참 좋아졌 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매년 ‘찾아가는 무형문화재 전통옹기 시연 및 체험 행사’ 열려
김일만 옹기장은 평소 전통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주 민이나 장애인들을 찾아가, 옹기를 만들고 체험하는 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름하여 ‘찾아가는 무형문화재 전통옹기 제작 시연 및 체험 행사’다. 이 행사는 한국 문화재재단과 국립무형유산원, 문화재청의 후원으 로 김일만 옹기장의 터전인 경기도 여주에서 매년 열 리고 있다. 그는 “행사장에서 주민과 아이들이 옹기에 흥미를 느 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면서 “앞으로도 찾아가는 옹기 체험 행사를 통해 많은 이들 에게 우리 전통 옹기문화를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만 옹기장은 이날 시연을 위해 반죽한 흙을 물레 에 돌려가며 정교한 손놀림으로 모양을 만들었다. 이 렇게 손으로 빚은 옹기는 응달에 며칠 동안 말리고, 중간에 유약(잿물)을 발라서 다시 응달에 20일 이상 건조시킨다. 이후 가마에 넣고 1000도가 넘는 온도 를 유지시키며 며칠 동안 불을 때서 굽는다. 전통방 식으로 옹기 만드는 과정을 본다면 그 정성과 정교함 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8대째 옹기 집안, 대를 잇는 손자들이 있어 든든
김일만 옹기장은 “아무리 정성 들여 옹기를 만들어 도 수없이 실패작이 나오며, 조금이라도 불량한 것은 버리고, 최상으로 완성된 옹기만 소비자에게 선보인 다.”고 말했다. 김일만 옹기장은 여든의 나이에도 여 전히 손에서 옹기를 놓지 않는다. “선조 때부터 8대째 옹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 손이 서른 살인데 80대까지 하려면 앞으로 50년을 더 해야겠지요. 그동안 아들들, 손자들 고생 많이 시켰는 데, 애들이 묵묵히 옹기 일을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든 든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매일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을 시작하 는 쌍둥이 장손을 보면 뿌듯하고, 요즘이 가장 행복 하다.”는 김일만 옹기장. 10대 소년이 여든 살 노인이 되기까지 한평생 ‘옹기’라는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는 천상, 하늘이 내려 준 ‘옹기장’이었다.
-글. 허주희
사진. 안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