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전통문화 기반 조성을 위한 40년의 발자취.
재단과 함께한 예술인들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한국문화재재단 40년, 전통문화 예술인들의 ‘산실이자 거처’
문화재와 전통문화는 ‘혈연관계’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 형성된 문화가 전통이란 ‘핏줄’을 타고 내려와 오늘날 의미 있게 자리 잡아 다음 세대에 가치 있게 전할 채비와 형태를 갖춘 게 문화재다. 이 문화재를 이름에 달고 있는 한국문화재재단은 필연적으로 전통문화의 진지이고, 플랫폼이고, 유통채널이다. 전통문화 관련 민간기관과 단체를 손으로 꼽을 수 있었던 80년대에 한국문화재재단은 이런 역할에서 우뚝섰다
01_한국의집 예술단장 故 정재만 선생 공연
02_ 대를 잇는 예술혼 故 박병천 선생(민속극장 풍류, 2004.10.14)
03_ 소리꾼 장사익 선생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의집은 전통문화의 전당(殿堂)이었다. 한국의집은 81년 2월부터 재단(당시는 한국문화재보호협회)이 운영하면서 전통음식과 전통혼례, 전통춤, 민속악, 정재, 판소리 등 전통문화전 부분을 이곳에서 펼쳤고, 한국의 내로라하는 전통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춤의지평을넓힌전통춤꾼, ‘송범·최현·정재만·국수호·홍금산’ 선생
81년 한국의집 무용단이 창단되어 초대 단장은 33세의 홍금산 씨가 맡았다. 홍금산 씨는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있다가 7명으로 창단한 무용단의 기틀을 다졌고, 그 뒤 한국의집을 떠나 있다가 2008년에 다시 한국의집 무용단장을 맡았다. 홍금산 씨는 한국의집 무용단장을 기반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살풀이춤) 이수자, 국립무용단 단원과 무용단 안무자, 예술감독을 맡으며 한국무용계의 원로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홍금산 단장 이후 최현 전 국립무용단장이 한국의집 무용단을 맡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이후 최현 단장은 문화재전문위원, 국립무용단 지도위원·단장,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초대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무용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최현 단장의 이러한 역량으로 한국의집 무용단은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 등 당시 크고 작은 문화행사에 초대되어 한국문화재재단이 전통문화 예술인들의 ‘산실이자 거처’임을 확인시켰다.
한국 무용계의 거목인 송범 전 중앙대학교 교수도 최현 단장 이후 한국의집 예술단장을 맡아 한국의집 무용단의 위상을 확인시켰다. 송범 단장은 1961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62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이사, 1969년 민속예술단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1973년 국립무용단장, 1982년부터 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맡는 등 한국 무용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이후에도 한국의집은 송범 단장의 제자인 정재만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가 예술단장을 맡아 한국의집 예술단원 전원이 정재만 보유자의 살풀이춤 전수 장학생이 되었고, 이 가운데 양서윤과 김세연 단원이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정재만 보유자는 송범 무용연구소 제자로서 한국 춤과의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한영숙 선생은 그를 제자로 데려가 승무를 가르쳤다. 이후 그는 세종대와 숙명여대에서 30년이 넘게 후학을 양성했고, 1986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의 안무를 총괄했으며 2002년 제17회 한·일 월드컵 전야제 안무총괄,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무용총감독, 2003년 제24회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무용총감독 등을 맡으면서 한국의집 예술단을 매번 참여시켰다.
정재만 단장 이후에는 국수호 단장이 2009년 한국의집 예술단을 맡아 전통에 기반한 창작무를 얹으며, 한국의집 예술단에 색채를 더했다. 국수호 단장의 안무로 창작된 ‘여명의 빛’은 국내외 여러 무대에서 호평을 받았다. 국수호 단장은 특히 1980년대에 안무가로 명성을 쌓아 1988 서울올림픽 개막식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공연의 안무를 맡았고 국립무용단 단장, 서울예술대 교수, 중앙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국수호 디딤무용단을 창단해 ‘무녀도’, ‘대지의 춤’, ‘한국 환상’, ‘봄의 제전’, ‘명성황후’ 등으로 춤극의 지평을 넓히며, 섬세한 안무 역량을 한국의집에 얹혔다.
북춤과 구음과 장단 ‘3박자’의 거장, ‘박병천’ 선생
한국 전통춤의 거장들만이 아니라 연주·소리의 명인들도 한국의집을 거처로 삼아 여러 빛깔의 예술의지와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며 한국의 대표적 전통예술인으로 활동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의 전통예술이 토실하게 살이 오른 건 내로라하는 거장과 명인들이 한국의집을 ‘성소(聖所)’삼아 기량을 닦고 활동한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한국의집을 거쳐 간 명인 중에 춤과 소리와 장단의 세 ’꼭짓점‘에 이른 딱 한 분을 꼽으라면 박병천 명인이다. 박병천 명인은 80년대 초 악사장을 맡으며, 한국의집 악사들의 소리를 이끌고 조율하고,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했다. 진도 씻김굿의 소리자락인 그의 구음(口音)은 ’하늘에 닿는 영혼의 소리’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구음만이 아니라 남도 농악판의 북놀이 가락과 춤사위를 다듬어 무대형식으로 승화시킨 진도북춤을 새로운 형식과 구성으로, 또 하나의 한국전통무용으로 ‘창조’했다. 한국무용계의 내로라하는 중견무용가들이 그에게 진도북춤을 사사하며, 지금은 전통춤의 한 장르로 자리 잡도록 했다. 북으로 치는 그의 장단은 구음 춤사위로 꾸려지는 북춤과 달리 또 하나의 예술 경지였다.
04_한국의집 명인명창 공연(앞줄 왼쪽부터 정재만, 안숙선, 국수호)
05_전시관람 중인 임영주 관장(왼쪽에서 두 번째)
06_전시관람 중인 예용해 선생(오른쪽에서 세 번째)
07_장사익 선생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공연 타이틀 캘리그라피
한국음악의 품색을 더한,
‘김방현·서용석·이생강·백인영·장덕화·
김청만·원장현·이태백’ 선생
박병천 악사장과 함께 한국의집 음악을 맡았던 분들은 백인영·안옥선 선생의 가야금, 김방현·서용석·이생강 선생의 대금, 장덕화·김청만 선생의 장단, 김광복 선생의 피리로 이어졌고, 현재는 대금과 아쟁의 명인 원장현 선생이 예술감독을 맡아 중견 예술인들의 한국의집 ‘무대’를 잡아주고 있다. 백인영 선생은 전통의 기반 위에 즉흥연주로 한국음악의 폭과 깊이를 더하며 한국의집 예술단의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한국 대금연주의 거장들인 김방현·서용석·이생강·원장현 선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국의집을 음악적 거처로 삼으며, 무대현장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자신들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장덕화·김청만 선생도 장단으로 가야금과 대금 연주자의 가락을 조율했고, 소리꾼의 추임새를 넣었다.
한국의 소리를 알린, ‘안행연·안숙선·안옥선’
‘이춘희·박송희’ 명창과 ‘김성녀’ 명인
특히 안숙선·안옥선 자매 명창은 10여 년 넘게 출연하며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로 외국인 관람객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한국 판소리의 대명사가 된 안숙선 선생은 80년대 10여 년 동안 해외 공연을 제외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한국의집 무대에 서며, ‘오늘의 기량’을 닦았다. 이 두 자매 전에 판소리의 거목인 안행연 선생도 한국의집에서 부채를 잡고 소리를 뽑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송희 명창, 이춘희 경기민요 보유자도 한국의집 무대에 서며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외에도 김성녀 선생, 이태백 선생 등도 젊은 날에 국악계 거장들과 한국의집에서 함께하며 한국전통예술의 색을 더해갔다. 이 분들은 몇 년 전까지 한국의집 명인명창 공연에 출연하며, 옛 관람객들과 함께 옛 무대를 추억했고, 문화예술인들의 산실이자 거처로서 한국문화재재단을 상기했다. 대중적인 국악인 오정해 씨도 재단과의 인연에서 빼 놓을 수 없다. 오정해 씨는 재단의 대표적인 브랜드 공연인 ‘굿보러 가자’ 사회를 2008년부터 맡아 오고 있다. 이 공연에서 오정해 씨의 비중은 여느 출연진 이상이다.
소리와 켈리그라피를 기부한,
‘장사익’ 선생
가장 한국적인 소리로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선생도 한국문화재재단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재단이 90년대 서울놀이마당을 운영할 때 가끔 태평소 연주자로 나서 흥을 돋았으며 서예가이기도 한 장사익 선생은 2008년부터는 한국문화의집 공연 포스터 켈리그라피를 재능 기부했다.「해어화」, 「율객」, 「가객」, 「지무」, 「이 땅의 굿」, 「아라리 봄봄」, 「명작명무전」 등 재단의 주요 공연 포스터의 캘리그라피는 모두 장사익 선생의 작품이다.
다양한 전시 분야에 참여한,
‘임영주’ 관장과 ‘예용해·이종석·석주선·
유희경·허동화·김영숙’ 선생
공연예술인뿐 아니라 공예인들도 재단과 인연을 맺으며, 서로를 북돋우고 살찌웠다. 전통문양사를 공부한 임영주 선생은 재단의 전통공예관장(1988~1997년)을 역임하며, 재단의 공예 관련 사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 임영주 선생이 쓰고, 재단에서 발간한 <한국의 무늬>는 지금도 찾는 이가 많은 스테디셀러다. 이후 전시사업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재단의 전시사업에 도움을 주신 분들은 한 두 분이 아니다.
작고하신 예용해(문화재위원)를 비롯하여 이종석(문화재위원), 석주선(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장), 유희경(문화재위원), 허동화(허동화자수박물관장), 김영숙(아시아민족조형학회 회장)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전승공예대전(1981~1999년)’ 심사와 기획전시 자문, 한국전통공예미술관(1995~1997년) 개관 등 무형문화재 전승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지원했다. 2000년 전승공예대전사업 이관 이후로는 ‘천공의 솜씨를 찾아서(2001~2008년)’, ‘무형문화재초대전(2003~2014년)’등 특별기획전이 그 맥을 이었다. 그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탁근(온양민속박물관 고문), 김성수(통영옻칠미술관 관장), 박영규(용인대 명예교수), 김종규(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많은 분들이 자문하고 조언하여 전통공예분야 전시 중에 비중 있는 전시로 자리 잡았다.
한국공예건축학교 강사로 활동한,
‘김희진·구혜자·박명배·박문열·김각한·이형만’ 보유자
재단이 운영하는 한국공예건축학교는 공예인의 산실이자 공예를 가르치는 공예 강사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보유자인 박문열 선생은 임영주 관장의 제안으로 재단이 운영했던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1993년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은 뒤 2000년에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그 뒤 한국공예건축학교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제자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소목장 박명배 선생도 공예건축학교에서 소목을 가르치며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활발한 교육과 전승활동으로 정부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명배 선생은 스위스 명품시계회사 바쉐론 콘스탄틴과 협업으로 한국의 전통 소목기법으로 시계함을 만들어 시계업계 및 공예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침선 초대 보유자 정정완 선생의 대를 이어 침선 보유자가 된 구혜자 선생(정정완 선생 며느리)도 공예건축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역시 교육과 전승에 이바지한 공로로 정부훈장을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며 40대 초반의 나이에 매듭장 보유자로 인정을 받은 김희진 선생도 한국공예건축학교에서 매듭을 전수하며, 재단을 통로로 전승기반을 확장했다. 김희진 선생은 올케 김혜순 선생에게 매듭공예를 전수하여 김혜순 선생이 2017년 매듭장 보유자로 인정받는데 멘토 역할을 했다. 김혜순 선생도 공예건축학교에서 현재 계속 매듭공예를 가르치며, 전승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의 ‘한국문화재재단’ 현판을 각자한 각자장 보유자 김각한 선생은 스승인 오옥진 선생을 만나 각자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해 오옥진 선생에 이어 보유자로 인정됐다. 오옥진 선생도 한국문화재재단 전신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현판을 직접 쓰고 각자해 현판 각자도 ‘사제지간’이 되었다. 김각한 선생 역시 공예건축학교에서 제자들에게 각자를 전수하고 있다. 김각한 선생은 안동시와 경북유교문화원의 지원으로 지난해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해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복각 책판을 한국학진흥원에 기탁했고, 6·25 당시 화재로 유실된 훈민정음 목각판을 3년 작업으로 복원하기도 했다.
나전장 보유자 이형만 선생도 1996년 보유자로 인정된 뒤 한국문화재재단과 인연을 이어가며,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이형만 보유자도 2010년부터 공예건축학교 강사로 나와 나전공예 전승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형만 선생은 나전의 본고장인 통영에서 나전기능을 익혔지만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 사사한 후 장일순 선생이 지냈던 강원도 원주에 공방을 차리며 원주를 나전의 명소로 만들고 있다.
한식의 위상을 높인,
‘정길자’ 궁중음식 보유자와 ‘하원철’ 청와대 조리실장,
‘김하진’ 요리연구가
한 때 국가의 영빈관 역할을 했고, 지금도 궁중음식을 기반으로 한 전통한식을 만드는 한국의집을 거쳐 간 한식 명인들도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1년 개관하여 한국문화재재단(당시 한국문화재보호협회)이 운영하던 한국의집 2대 조리실장을 한 정길자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는 재직 당시에도 86년 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찾은 귀빈들에게 만찬으로 한식을 제공하며, 재단과 한식의 위상을 높였다. 80년대 청와대 조리실장 경력을 지녔던 하원철 조리실장도 한국의집에 근무하며 재단과 연을 맺었다. 요즘 방송에서 여러 요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요리연구가 김하진 씨도 한국의집에서 요리 실력을 다진 뒤 롯데호텔과 신라호텔 조리부장을 지냈다.
답사와 강의를 이끈,
‘정영호·성춘경·윤용이’ 교수와 ‘윤열수’ 회장,
‘이종태’ 교수
이 분들 외에 답사와 강의로 재단에 ‘문화의 살’을 찌운 분들도 많다. 불교미술사학자였던 故정영호 교수, 역시 불교미술을 전공하여 주로 광주와 전남에서 활동한 성춘경 선생, 도자기 연구자 윤용이 교수, 민화연구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 윤열수 한국박물관협회장, 이종태 국민대 교수 등이다.
08_ 2019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은 소목장 박명배(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09_ 2015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은 침선장침선장 구혜자(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10_한국의집 2대 조리실장 정길자(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
11_단국대 정영호 교수(일본 석탑사, 1992.1)
-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