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시선집중, 언론이 주목한 한국문화재재단
지난 한 해 동안 한국문화재재단의 사업과 소식은 언론에 모두 2천 540회가 보도되었다. 유수한 매체에서부터 다소 생소한 온라인 매체까지 전부 포함해서인데 방송과 신문에 보도된 건수만 해도 무려 239건이다. 이처럼 한국문화재재단은 창립 이후 40년 동안 여러 언론과 언론인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탄탄히 성장해 왔다. 가끔은 뼈아픈 지적도 있었지만, 전통문화 전승자들의 전승활동에 애정을 듬뿍 담아 그들의 활동을 힘차게 응원하기도 했고, 일부 언론인들은 재단의 어려운 속사정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도 했다. 40년 넘게 이어진 언론의 진심과 응원 속에서 한국문화재재단은 더 견고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재단 창립 초기,
‘한국의집’ 중심 언론보도 많아
재단 창립 다음 해에 운영을 맡은 한국의집 개관을 언론들이 크게 보도했다. 매일경제는 81년 2월 21일자에 『‘한국의집’ 개관-전통음악 무용 상설공연장 등 갖춰』라는 제목으로 3단 크기로 보도했다. 당시 남덕우 국무총리가 이광표 문공부 장관의 안내로 한국의집을 둘러보는 사진과 함께 크게 실었다.
개관 1주년 무렵인 82년 2월 24일자 매일경제는 『한국의집 개관 1주년 다도 전통식 보급 강화』란 제목으로 3단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81년 8월 3일자 문화면 사이드 기사로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상설전시장 한국의집 개관- 전통악기들 한자리에 옛가락 옛소리 못 잊어, 무속가구 포함 100여 점 선봬, 세종 때 ‘건고’ 첫 공개, 산재한 것, 수집하고 없어진 것은 제작』의 제목을 달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82년 12월 6자에 『그윽한 옛 향수의 맛을빚는다. 전통주 개발 한창, 문화재보호협회 전승박차, 면천 진달래술은 복원, 내년 봄부터 외국 관광객들에게 시판, 86년·88년 대비 연차적으로 개발』을 주제로 4단 크기로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다음 해인 83년 4월 9일자에 『구식결혼 권장해야 한다. 하고 싶어도 장소 없어 못해, 보사부선 의례준칙 들어 식장허가도 안 해줘, 작년 한국의집서 451쌍 거행』이라는 기사를 문화면 톱기사로 실었다. 요즘 한국의집 전통혼례 250여 건에 비하면 2배에 가깝다.
동아일보 83년 4월 2일자는 『전통 차도(茶道) 어떻게 이어나갈까-정신수양에 좋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한국의집에서 했던 차와 관련한 강습을 소개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공연 중심 단위사업위주 보도
중앙일보는 86년 8월 18일자 문화일보 톱기사로 제11회 전승공예대전을 다뤘다. 요즘은 1단 기사로도 나가기 쉽지 않은 추세에 비하면 전승공예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기사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박정자 씨는 ‘금니부모은중경 14곡 병풍’으로 대통령상을 받았고, 인터뷰도 실렸다.
중앙일보는 88년 1월 27일에 『문화단체 새해설계』 시리즈물을 게재하면서 한국문화재재단의 전신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의 그해 사업 내용을 다뤘다. 『민속 전통공예의 독창성 알린다』라는 큰 제목 아래 탈춤 등 마당놀이 공예대전 등의 소식과 함께 『미·소(현 러시아) 중공(현 중국) 등 12개국 참가 국제민속축제국제문화협회』등을 문화면 박스 기사로 실었다.
동아일보 89년 6월 6일자에는 재단 자체 사업이 아니라 후원하는 사업에 눈길을 돌렸다. 『단오풍속 되살린다』라는 제목으로 우리 재단이 운영했던 서울놀이마당에서 펼쳐졌던 ‘단오절 청소년 민속축제’를 후원해 청소년들에게 단오절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당시 기사에는 “팝송과 디스코는 알아도 우리 고유 풍물놀이는 낯선 청소년들에게 겨레의 얼과 정서가 담긴 우리 놀이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 민속제의 취지”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다.
동아일보 89년 6월 10자에는 일반인들에게 답사 개념이 생소했던 일본 문화유적답사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문화재보호협회와 동아일보가 공동사업으로 추진했던 ‘일본 속의 한국문화유적답사’를 따라가서 쓴 기사다. 『대마도 한국인 순국비 건립 활발』이란 큰 제목 아래 ‘한일학자들 민간차원 추진결실’, ‘최익현 이어 박제상비 제막, 숙종 때 풍랑 숨진 조선역관 위령탑 추진’ 등의 작은 제목이 실렸다. 당시 답사단을 이끌고, 그 뒤 재단이 했던 국내외 답사 해설을 주로 맡으며 순국비 건립을 추진했던 정영호 교수의 설명도 실려 있다. 같은 해 같은 신문 89년 12월 6일자에는 재단이 동아일보 문화센터와 함께했던 답사 내용이 신문 한 면 전체에 실려 재단이 추진한 답사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신문은 그해 11월 28일부터 12월 4일까지 6박 7일 동안 오사카 나라, 교토, 도쿄로 이어지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 학술기행』이란 제목으로 전면에 답사 내용을 실었다.
『일 국보1호는 완연한 신라불상』이란 큰 제목 아래 『목재부터 일본에서 안 자라는 적송, 우리 국보 83호 청동반가상 닮아』라는 제목으로 교토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관람 소식을 전했다. 당시 답사 인원은 120명으로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학술적으로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답사객 중에는 제1호 궁중음식기능보유자였던 故 황혜성 전 성균관대 교수도 참여해 답사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90년대 한국문화재재단이 하는 프로그램을 정보성 기사로 실어 답사에 관심 있는 시민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했다. 동아일보는 91년 6월 7일자에 『일 대마도 유적답사-한국문화재보호협』이라는 단신성 기사를 실었고, 조선일보도 95년 5월 4일자에도 『배워야 제대로 보인다』라는 제목으로 재단 답사 프로그램을 안내했다.
90년대, 사회 현상에 맞춰 답사
프로그램 기사 비중 커져
조선일보 91년 10월 19일자에는 민속예술경연대회 소식이 사회면에 아주 비중 있게 실려 있다. 당시 대통령상을 받은 ‘여수영당풍어굿’에 관한 내용을 전해주며, 한국문화재보호협회(당시) 이사장상은 ‘정읍농악’이 받았다고 실려 있다. 지금은 중앙지의 경우 지면보도는 찾기 쉽지 않은 민속경연대회 결과를 수상작 ‘여수영당풍어굿’ 사진과 함께 크게 실었다. 올해부터는 한국민속예술축제 시상에서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상이 없어져 언론이 크게 보도하더라도 우리 재단 이름이 실릴 일도 없어져 더 아쉽다.
조선일보는 9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짧은 칼럼 ‘일사일언’에 김전배 당시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을 필자로 참여시켜 여러 차례 문화유산에 관한 칼럼을 쓰도록 했다. 현 진옥섭 이사장은 이 신문 ‘일사일언’ 칼럼을 25년만인 2019년1~2월에 건네받아 모두 7차례를 썼다.
동아일보는 90년대에도 전승공예대전 수상 결과를 문화면에 전면 컬러로 실었다. 당시 대통령상은 전통발을 엮은 조대용 국가무형문화재 전통발 보유자(현재)의 ‘용자구갑문발’ 컬러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박스로 처리했다. 국무총리상(박경옥 씨의 작품 ‘채화칠국당문예물함)’과 장관상 작품(조정훈 씨의 작품 ‘목각수월관음도목판’,이경자씨의 작품 ‘입사문구류’)도 컬러 사진으로 실렸다. 입상자 전체 명단도 실어 전통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 93년 7월 20일자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비디오로 제작』이란 큰 제목에 『은신별신굿 등 15종 다섯 편에 수록, 기능보유자 공연-제작 장면 담아 민속 등 전통문화시리즈 66편 나와』 등의 제목으로 재단의 무형문화재 기록화사업에 관심을 표했다.
01 _ 동아일보 1988년 1월 27일자
02 _ 중앙일보 1986년 8월 18일자
03 _ 동아일보 1989년 12월 6일자
2000년대, 굵직한 발굴 소식과
기획공연·전시 늘면서 관련 보도 늘어
2000년대에는 매체 환경의 다양한 변화로 재단의 사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유수 언론들의 보도 양태도 크게 변화했다. 우선 인터넷 매체가 많은 양의 보도를 쏟아냈고, 기존 언론들은 공연 중심 궁능활용사업 중심으로 전통문화활용사업의 보도를 늘려나갔다. 동아일보 2003년 12월 17일자에는 덕수궁터 미대사관 신축부지 지표조사를 맡았던 재단 소식이 실려 있다. 『덕수궁터 미 대사관 신축여부 내일 판가름』이란 제목으로 “미 대사관은 문화유적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올해 6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중앙문화재 연구원에 지표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궁궐터임을 보여주는 문의 주춧돌과 기와 석재 등 건물의 흔적과 각종 유물이 확인됐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같은 신문 2004년 2월 24일자에 『인천서 4세기 백제가마터 발견, 한성백제 연구 중요자료』라는 제목으로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 연구단(단장 김정기)은 인천시 계양구 동양동 동양택지개발사업지구와 서구 불로동 불로지구 4구역 토지구획 정리사업지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에서 4세기 백제 가마터와 백제시대 토광묘 4기, 1∼3세기 주구묘(周溝 墓)로 추정되는 분묘, 청동기시대 전기의 주거지를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며 비중있는 발굴 기사를 실었다. 한국일보도 2010년 6월 19일자에 『신라초기 수장급 목관묘 경주시에서 처음 나왔다』라는 기사로 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의 발굴 내용을 실었다. 이 기사에는 문화재조사연구단 박강민 팀장의 “출토된 토기를 볼 때 1~2세기 무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면서 “사라리 유적 등 그동안 경주 외곽에서만 나왔던 수장급 묘가 경주시내에서 처음으로 발굴조사 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2007년 4월 6일에는 39년 만에 열린 북악산 소식이 실려 있다. 동아일보는 1면에 북악산 서울성곽 사진과 함께 실었고, 사회면에 등산로를 도표와 함께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재단이 직접 했던 사업 중에 신문 1면에 등장한 것은 이 기사가 처음 아닌가 싶다.
2010년대 전후,
빼어난 기획에 특별한 기사 많아
2006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는 『특별한 기획전시웃는도깨비 특별전』을 특별하게 다뤄, 문화면 절반을 할애해 전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푸하하…도깨비 왔소’, ‘우리 문화재 속 웃는 도깨비, 내달 12일까지 전시』라는 제목과 함께 요사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도깨비 사진을 실었고, 전시 내용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시 의미를 들려줬다.
2007년 9월 19일 같은 신문에는 재단이 창경궁에서 했던 어연례 행사에서 주요 출연진을 일반시민 중에서 뽑은 사실을 알려주며, 왕세자로 뽑힌 당시 경기도 고양시 무원초교 2학연 정건혁 군의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정군의 할아버지는 퇴직 뒤 경복궁 안내 자원봉사자였고, 아버지는 주말마다 유적지를 답사하며 문화재 서적 수집광이었다고 전했다.
2002년부터 시작하여 재단의 대표적 사업이 된 수문장 교대의식은 처음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고, 다채로운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그중에서도 재미있는 기사는 2015년 5월 29일 동아일보 사회면 실린 『광화문 나란히 지키는 수문장과 영국 왕실 근위병』이다. 주한 영국대사관과 영국항공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생일(4월 21일)을 기념해 이날 근위병 승무원과 수문군이 광화문을 지키는 장면을 ‘연출’하여 볼거리를 제공했다.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진옥섭 이사장의 기획공연
재단이 운영하는 한국문화의집 예술감독으로 탁월한 공연 기획을 하면서, 거의 모든 공연 내용이 신문 문화면 톱으로 기사화되었다. 얼추 뒤져봐도 동아일보 2009년 3월 12일자에 『광대 부모의 길, 아들도 그 길에 서다』, 『20일~31일 유랑광대전 펼치는 ‘찰개비’ 가족』이란 제목으로 지면의 반을 채웠다. 답사에 공연을 얹었던 ‘풍류로드’는 2011년 4월 21일 한국일보 기획특집 『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란 전면에 실렸다. 소리꾼 심정순의 고향 서산에서 시작하여 군산의 마지막 예기, 민살풀이춤의 장금도 선생을 불러내 현장 공연을 했던 내용과 담양의 지실초당 답사와 그곳에 얽힌 소리꾼 얘기로 이어지는 내용을 오미향 기자가 정리했다. ‘풍류로드 해외판’ 격인 2018년 12월 ODA사업 현장인 캄보디아 공연과 답사가 기사화되었다. 2020년 1월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유적복원에 관해 조선일보의 현장 취재로 이어져 기사화됐다. 이외에도 장금도, 유금선 선생이 출연한 2013년LG아트센터 공연 ‘마지막 해어화’, ‘무박2일 20시간의 굿’ 등 수많은 공연과 그보다 몇 배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최근에는
궁중문화축전 행사 보도 많아
최근에는 궁중문화축전 관련 기사들이 신문 지면을 많이 차지했다. 궁중문화축전을 처음 시작한 2014년부터 최근까지 정보와 칼럼, 문화재청장 및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 인터뷰 등을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보도했다. 첫해는 고궁 야간 프로그램 정보를 많이 제공했고, 궁중문화축전의 의미, 해설도 보도했다. 횟수를 거듭하며,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 행사는 언론들의 보도도 계속 이어지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인터넷 언론들이 수없이 많아 기록물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언론과 함께 남긴 글자 하나하나, 사진 하나하나가 모여 한국문화재재단의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04_동아일보 1993년 7월 20일자
05_한국일보 2010년 6월 19일자
06_동아일보 2009년 3월 12일자
07_조선일보 2020년 1월 10일자
08_동아일보 2015년 5월 29일자
-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