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재단의 발자취로 본 전통문화보급의 역사
문화재조사연구
글.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
한계를 극복한 문화재 발굴의 순간들
한국문화재재단 창립 40년 역사의 한 분야에는 문화재조사연구단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덧 설립 25년을 맞이한 문화재조사연구단의 탄생은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 역사의 필연적 탄생으로, 한국문화재재단 성장과 혁신의 근간이었다.
문화재조사연구단의 필연적 탄생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의 역사는 불행히도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1945년에 발족된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와 연구를 수행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는 1970년대부터는 국토개발사업의 증가로 인해 매장문화재 발굴 수요가 늘어났다. 이 시점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국립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대학박물관 등에서 주도했지만 매년 증가하는 발굴조사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발굴조사 수요의 급증으로 발생되는 조사 업무의 지연은 국토개발사업 시행자의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발굴의 결과로 나타나는 역사·문화사적 학술자료의 수집에도 차질을 빚게 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반복되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문화재관리의 주무관청인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연중 발생하는 많은 발굴수요와 예산에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민간차원의 발굴조사 전문기관의 설립을 적극 검토하게 됐다. 그리고 발굴의 수요자인 사업시행자뿐만 아니라 발굴의 주요 공급기관인 학계에서도 대학박물관이 주도해 오던 행태에서 벗어나 발굴조사 전문기관의 설립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한국문화재단에서는 무형문화재의 보호·선양과 전통생활문화의 계발에 치중해 오던 사업의 범위를 유형문화재의 분야인 매장문화재 조사연구사업으로 확대하여 추진하고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매장문화재 조사연구사업에 대한 승인을 얻어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실’을 신설했다. 이로써 전국 발굴전문기관으로서는 두 번째로 출범하게 됐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실은 ‘발굴조사사업단’으로 확대되었고, 1999년 12월 30일 현재의 ‘문화재조사연구단(이하 조사단이라 함)’으로 개칭됐다.
01_청도 화리 석검 일괄(2008)
02_울산 하삼정고분군 항공사진(2004)
전국 대규모 문화재 발굴에 주도적 참여
고고학적으로 발굴은 유적의 파괴라 한다. 현시점의 가장 좋은 기술력과 분석력으로 발굴조사를 한다 해도 유적의 원상을 모두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정된 시간과 예산에 쫓기는 구제발굴에서는 더 많은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도시화 및 산업화에 따른 국토개발로 부득이 땅속 선조들의 흔적을 구제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의 90% 이상이 구제발굴이다.
조사단의 발굴조사는 1995년 ‘서울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지’에 대한 학술발굴 조사에 이어서 ‘경북 경산 임당동 유적’에 대한 구제 발굴조사를 하면서 전국 발굴조사 전문기관으로서의 첫발을 본격적으로 내디뎠다. 조사단은 설립 초기부터 중부권역과 남부권역으로 나누어 경주와 현도(현 청주)에 각각 사무소를 두고 문화재조사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유적조사에 참여가 가능했고, 이러한 결과, 다종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조사단 설립 당시부터 전국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대규모 택지 및 산업단지 개발, 댐 건설,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들이 폭증했고 문화재 발굴수요 또한 궤를 같이 했다. 이때 발굴전문기관들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 곳곳의 발굴에 참여하는 실정이었다. 조사단은 전국 주요 대규모 발굴유적 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사업시행기관의 계획된 개발과 문화재 보존을 조화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조사단이 참여한 발굴조사의 주요 대규모 개발지는 지명만 들어도 대다수가 알 수 있는 곳들이며, 국토개발 역사의 발전상이라 할 수 있다. 택지개발 유적 조사지로는 의정부 민락, 성남 판교, 인천 검단·원당, 운서, 불로·동양, 김포 신곡·장기, 청주 용암·성화, 용인 동백·구성, 평택 용이, 파주 운정, 화성 동탄, 대구 칠곡·신서·동호, 경산 임당·사동·서부, 포항 원동, 울산 우정, 김해 진영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산업단지로는 김포 양촌지방산업, 수원 첨단R&D, 청원 오창과학산업·오송생명과학, 상주 청리지방산업, 왜관 일반지방산업, 포항 영일만2일반산업, 울산 중산일반산업·모듈화산업 등이며, 댐 건설 수물지는 울산 대곡댐이 유일하다. 고속도로는 서수원-오산-평택 고속도로, 서해안 고속도로 당진·서천, 중부내륙고속도로 수안보·충주·상주·구미, 중부고속도로 음성·문촌, 광주대구고속도로 성산·옥포, 경부고속도로 경주-동대구 등이며, 경부고속철도는 울산구간과 수도권고속철도 동탄역사부지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전국 국도 및 지방도로의 개설과 아파트 및 공동주택 등 각종 크고 작은 건축 개발에 앞서 문화재 발굴을 진행했다. 가장 큰 발굴은 경주 읍성 3·4구간이었으며, 현재도 5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5년까지 크고 작은 일반구제 및 학술조사를 모두 아우르면 약 300여 개소에 달한다.
소규모 국비발굴조사 전담 운영 등 공적 업무 수행
문화재청에서는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에서 개인 및 영세업자들이 단독주택, 사업목적 건축물, 농어업 및 공장 등의 건축물을 소규모로 짓고자 할 경우, 일정 기준에 한해서는 전액 국비발굴을 지원하는 제도를 2004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 발굴 수요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러한 민원성 소규모 발굴조사에 전문발굴기관들이 적극 참여해 주도록 독려와 장려를 펼쳤으나, 당시 폭증하는 대규모 발굴이 우선이었고, 소규모 발굴은 뒷전으로 밀려남으로써 전국적으로 민원 발생이 급증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2010년 문화재청에서는 산하기관이자 특수법인인 한국문화재재단 조사단에 소규모발굴조사 전담팀을 구성하여 운영하도록 요청을 했다. 당시 조사단에서는 대규모 발굴조사 현장과 조사된 유적의 보고서발간이 한창 진행 중으로 여력이 넉넉하질 못했다. 또한 소규모발굴을 전담하게 되면 행정처리 및 소규모 발굴현장의 대폭 증가와 조사단 운영비 부족 등의 어려움이 예견되었다. 그러나 공적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공공기관으로서 국가적인 민원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담 운영을 당위성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이를 바로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설립 초기부터 시설과 연구 인력이 중·남부권으로 분산 배치되어 전국 각지의 발굴조사를 하면서 축적된 역량 때문이었다. 조사단이 전담 운영하면서부터 민원 접수 및 지원의 불편사항 개선과 확대 지원의 효과를 점차 거두게 되었으며, 그러한 일련의 성과로 현재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조사단이 전담운영하면서부터는 소규모 발굴지원사업의 효과로 이전보다 발굴신청 건이 더욱 증가하는 추세였고, 이에 따른 사업비도 계속 증편됐다. 즉 2010년에 재단이 30억 원을 배정받았으나 2020년 현재는 146.5억 원으로 증가된 것이 그 실체다. 조사단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대외 일반 발굴조사를 줄이면서 소규모 발굴 전담팀 쪽으로 인원을 증편했다. 2012년부터는 학술발굴조사와 이전에 용역이 중지되어 있는 한두 개의 일반 발굴조사 외에는 모든 대외 일반 구제발굴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써 소규모 국비발굴조사에만 전념하게 됐으며, 발굴조사 현장도 규모는 작지만 전담 운영 이전보다 전국 곳곳의 도심지와 근교, 임야지로 더욱 확대됐다. 즉 조사단 설립부터 2015년까지 모든 일반 발굴조사 현장이 300여 개인 것에 비해 소규모 발굴조사는 매년 평균 200개 내외가 운영됐다. 특히 전담 운영 이전까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호남지역과 제주지역까지도 조사를 확대 진행했다. 그러나 조사단 인력 확대의 한계로 모든 소규모 발굴수요를 지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4년부터는 이전까지 제주도 지역만 그 지역 전문조사기관에 대행조사를 맡기던 것을 전국 발굴전문조사기관으로 확대한 것이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조사단이 전담 운영하면서 지원한 전국 소규모 발굴은 2,715개소이며, 이 중 조사단이 1,944개소를 직접 수행했다. 소규모 발굴조사는 면적이 작다 해도, 어느 대규모 개발지보다도 더 절실한 개인 및 영세사업자들에 대한 대국민 서비스다. 또한 작은 면적이라도 멸실될 수도 있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찾아 기록하고 보호·보존하는 일은 대규모 발굴 유적 못지않게 더 큰 보람과 성과가 있다.
25년간 전국 유적 자료의 축적과 공유
조사단 25년 전국 발굴은 앞의 일반 발굴 15년과 뒤의 소규모 국비발굴 10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국 8도에 걸쳐 대규모 유적과 소규모 유적 조사를 시행했으며, 이를 통해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기의 유구와 유물에 대하여 기록과 수습을 했다. 모든 시대의 삶·생활·죽음의 과정에 남겨진 집터·생산지·무덤 속에서 찾아진 석기·토기·목기·금속 유물 하나하나는 발굴조사가 되면서부터 사람의 신분증처럼 고유 번호를 가지며 새로운 삶과 대접을 받는다. 출토된 유물은 정교하고 세밀한 보존처리와 복원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조사된 유적의 유구와 유물은 드러난 그대로의 모습과 복원, 분석, 연구를 통해 발굴조사 보고서에 고스란히 게재된다.
조사단에서는 2019년까지 397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발굴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여 대외에 배포하고 공유했다. 보고서 발간 후 국가자산의 유물은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하였다가 모두 국가에 귀속하고 있는데, 2019년까지 105,757점을 이관했으며, 아직 19,289점은 이관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까지 발간된 모든 발굴조사 보고서는 한국문화재재단 조사단 홈페이지(www.cprc.or.kr)의 자료실에서 자료 검색과 자료 열람 요청이 가능하다.
03_2002~현재 청주사무소
04_울산 대곡댐 유적의 기와가마
05_성남 판교 9구역 출토 철제마
06_상주 청리 유적의 석실분
- 글.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