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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3
‘디지털문화유산 나눔방’ 체험기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디지털문화유산 나눔방’에서
VR로 체험한 문화유산
지난겨울 추위와 올 초 중국 우한에서 번진 코로나19로 궁 나들이를 미뤘던 김 씨는 고궁박물관 재개관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경복궁 나들이에 나섰다. 김 씨는 경복궁 입장 전에 고궁박물관 내 카페 ‘고궁뜨락’에 들렀다가 살짝 놀랐다. 몇 개월 만에 고궁뜨락 공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식사와 차, 커피를 마시던 공간은 크게 줄고, 대신 생소한 이름의 ‘디지털문화유산 나눔방(이후 나눔방)’이 있었다. ‘고궁뜨락’이란 예쁜 이름과 단정하고 아늑했던, 그 이름에 걸맞은 내부 공간이 줄어들고 ‘나눔방’이 들어선 것은 디지털 문맹인 그에겐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커피와 간단한 다과로 입가심을 한 김 씨는 ‘나눔방’이 궁금해 궁 나들이 전에 이 방 ‘나들이’부터 했다.
문화유산을 가상으로 체험하는 여섯 공간
영화배우 원빈과 이름은 같고, 용모는 더 빼어난 듯 보이는 고궁뜨락 직원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눔방’은 여섯 개 공간이 여행길처럼 나뉘어 있다. 실제 명칭도 <VR(가상현실)/AR(증강현실)체험존>, <인터랙티브 미디어 월>이 있는 공간과 <VR체험존>, <다면 영상체험실>이 있는 공간을 이어주는 ‘열린 복도’가 <문화유산 여행길>이다.
먼저 VR/AR체험존에 서서 헤드셋을 쓰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 제24호 석굴암 답사에 나섰다. 헤드셋을 쓰고 작동을 하자 석굴암 건축과정을 보여주듯 돌 구조물이 쌓이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현장감 있게 보여줬다. VR에서는 석공기술 대신 마치 드론이 석조물을 들어 짜 맞춰 건축하듯 보였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보호벽이 있어 내부 관람을 전혀 할 수 없지만 이곳 가상현실에서는 내부를 ‘정밀 체험’ 할 수 있었다. 전실의 팔부신중과 사천왕상, 원실의 본존불, 본존불 양옆의 10대 제자, 벽면에 세운 제1감실부터 제10감실까지 보살상도 세밀히 볼 수 있다. 가상현실 안의 화살표를 원에 담으면 전실과 원실, 본존불, 감실의 전경 외에 부처상과 보살들을 개별적으로 관람하고, 관찰이 가능했다. 이 가상현실은 ‘정면입체’가 아니라 360도 사방입체였다. 그동안 다녔던 토함산 석굴암 답사는 겉보기였다.
옆걸음으로 한 발 옮기자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사적 제3호 수원화성을 AR(증강현실)로 만날 수 있었다.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특수제작으로 이미지 마커 기능을 얹혀 증강현실로 의궤에 나온 팔달문, 화서문, 서북 공심돈, 방화수류정 등 현장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다 더 세밀하고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구조와 재질도 뚜렷하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구조물의 문화적 가치들도 설명해 줬다. AR로 본 수원화성은 VR로 봤던 석굴암 모습과는 또 달랐다. 김 씨는 두 체험만으로도 디지털 문맹에서 벗어난 듯해 줄어든 카페 ‘고궁뜨락’ 공간의 아쉬움을 털어냈다.
‘디지털문화유산 나눔방’ 여섯 곳을 한 시간 넘게 전국의 문화유산을 슬로우 로드(Slow Road)로 유유자적(悠悠自適) 둘러보며, 한국 문화의 저력이 선조들이 축적한 ‘전통과 정통’의 문화유산에서 나오지 않는가 생각했다.
실제 답사 같이 흥미로운 체험 가득
원빈 씨의 안내로 <인터랙티브 미디어 월>로 다가섰다. 가로 5.5m 세로 1.2m 크기의 대형 터치스크린에서 미디어 아트영상이 재생되었다. 3D스캐닝과 모델링 데이터로 구현된 250여점의 다양한 디지털 문화유산들은 미디어 아트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다. 바로 앞에 비치된 태블릿 PC는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진 오브제였다. 세 개 화면으로 분할된 스크린을 터치하면 원하는 문화유산이 구현되어 스크린 속 답사가 가능했다. 미디어 아트 영상에는 네 개의 문화재와 프랙탈 아트가 경복궁을 주제로 재현되어 잠깐 ‘막 전환’도 이어져 흥미를 더했다.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진 사적 제123호 창경궁을 퓨전국악 배경에 클라우드 포인트 형식을 통해 표현했다. 이어폰으로 국악을 들으면서 클라우드 포인트 형식으로 구현하는 색안경을 쓰고 직접 창경궁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경판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도 3D 스캔데이터와 모델링 데이터를 활용해 재구성한 화면으로 연출됐다.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직접 본 듯했다. 같은 방식으로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 모습을 사각 파티클 모양으로 구현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만 담긴 게 아니다. 담백하면서도 해학적인 안동하회탈(국보 제121호)의 무심히 웃는 모습도 담았다. 입체적인 미디어 아트 영상이다. ‘인터랙티브 미디어 월’ 옆 키오스크에서는 구역별 안내, 체험존 설명 및 콘텐츠 목록 등 종합정보를 안내한다. 더 재미있는 건 <방명록> 기능으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자신의 전자우편으로 받아 볼 수 있는 점이었다. 김 씨도 원빈 씨의 도움으로 사진을 촬영해 전자우편으로 받았다. 아차! 아쉬웠던 건 영화배우 원빈보다 더 수려한 용모를 지닌 김원빈 씨와 인증샷을 놓친 거였다. 다음 방문 때는 이걸 목적으로 삼으리라.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즐기는 여행길
이 두 공간에서 가상체험을 끝내면 25m 길이의 ‘문화유산 여행길(이후 여행길)’이 길잡이를 앞선다. ‘여행길’ 중간에 ‘정보 탁자’겸 ‘휴게 탁자’가 놓여 있어 25m길이를 ‘슬로우 로드(Slow Road)’로 쉬면서 정보를 얻으며 갈 수 있다. ‘여행길’ 양옆에 1천여 권의 문화유산 책이 꽂혀 있어 ‘슬로우 로드(Slow Road)’를 ‘슬로우 리드(Slow Read)’로 전환할 수도 있다. 권수는 1천여 권이지만 구성은 어린이 책부터 교양서적, 전문서적까지 있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올 수 있으며 친구와 같이 와서 볼 수도 있다. 서적 외에 이 공간을 운영하는 한국문화재재단의 참여형 프로그램 안내, 사업장 안내, 한국관광공사의 테마여행 안내책자,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유산 안내책자 등 다른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여행길’이다.
‘여행길’이 끝날 즈음에는 다시 VR체험존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특수 기술로 제작한 가상과 현실을 드나들며 주요 문화유산을 360도로 입체감 있게 볼 수 있다. 김 씨는 이곳에서 현실보다 더 가까이 가상으로 여생의 버킷 리스트에 담은 독도 천연보호구역을 여행했다. 직접 탐방에 나섰다면 입도 구역에서 멈췄을 독도 탐방을 헤드셋으로 독도의 동도와 서도 사이를 다녀왔고 독도 주위를 배를 타고 빙빙 한 바퀴 돌면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독도 전체를 위에서 봤다. 드론으로 찍은 영상에는 입도해 있는 관람객들도 보이고 독도 지킴이들인 경찰들 숙소 인근까지 보였다. 독도의 식물과 바닷 속 생물들뿐만 아니라 독도를 구성하고 있는 석질들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볼 수 있었다. 이제, 독도 탐방을 버킷 리스트에서 제외할 만큼 현장감 있게 탐방했다.
이곳 VR체험존에서는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창덕궁 희정당, 설악산 토왕성 폭포, 한라산 백록담, 제주도 문섬 · 범섬 천연보호구역 등 문화유산의 세부 구조물과 구역을 현장보다 더 상세히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근정전 구석구석 대들보, 서까래, 단청 등 고색창연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한라산 백록담의 식생, 문섬과 범섬의 주상절리, 그곳의 무늬며 이끼까지도 관찰이 가능했다. 특히 설악산 토왕성 폭포(명승 제96호)는 설악산 3대 폭포로서 대청봉을 중심으로 설악산 동쪽에 있다. VR체험존에서 본 폭포 역시 독도처럼 실제보다 현장감이 더하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그 모습은 선녀가 바위에 널어놓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절경이다. 명승이 왜 문화유산이어야 하는지를 영상으로 ‘증명’한다.
관람객을 위한 편안함과 다양함이 곳곳에
가상공간 대기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는 이 공간 운영의 으뜸이다. 가상공간 위에는 모니터를 설치하여 한국문화재재단이 구축해 놓은 문화유산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4대 궁궐의 봄꽃 풍경, 문화유산의 사계절, 한국의 천연기념물(동물), 섬 문화유산 기행, 한국의 정원 등 국제영화상 수상작품과 자주 가거나 직접 들여다보기 어려운 지역 문화유산 영상과 유명인들의 문화유산 해설과 체험 영상도 들어 있었다. 대기자의 지루함을 문화유산의 아름다운 영상으로 지울 수 있도록 했다. 작지만 아주 인상적이었던 편의시설 하나는 음료수 보관대. 음료수를 마시다 편하게 놓고 VR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바로 옆에 보관대를 설치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VR체험존에서 오른쪽으로 두 걸음 옮기면 38.5㎡ 크기의 다면 영상체험실이 있다. 문화유산을 디지털 영상으로 담아 다면(多面)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예술성을 더해 연출했다. 먼저 창덕궁(사적 제122호)을 주제로 한 영상은 창덕궁의 과거현재-미래를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미디어아트다. 19세기 초 창덕궁을 하늘에서 바라 본 동궐도를 붓으로 그리는 영상을 보여준다. 다음 화면은 2012년 문화재청에서 3D 스캐닝을 통해 기록한 건축의 측면에서 창덕궁 곳곳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현재의 창덕궁 모습을 초고화질로 촬영해 기록하여 그 가치와 문화유산 기록보존의 중요성을 전한다. 조선 중종 때 학자 양산보가 전남 담양에 개인정원으로 조성한 소쇄원 (명승 제40호)은 전통정원의 아름다움과 선조들의 풍류를 따뜻한 색감으로 보여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고창, 화순, 강화도의 고인돌을 다양한 형식과 밀집도로 4K 영상에 담았다. 설악산 울산바위(명승 제100호)는 고정된 위치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를 고품격 영상으로 담아 이미지 다큐형식으로 보여준다. 태백산천제단(국가 민속문화재 제228호)도 백두대간을 따라가며 대간에 놓인 문화유산과 그 자체의 자연유산, 이 유산들이 쌓인 역사 속의 무형유산을 역시 이미지 다큐로 제작했다. 한국의 ‘새’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들만 촬영한 자연다큐도 다면 영상체험실에서 만날 수 있다. 전남 완도 해변의 파도와 자갈의 울림을 담은 영상도 백미다. 이 공간에는 북 프로젝트가 설치되어 있어 생체동작 인식으로 이들 영상 중에 원하는 영상을 15분 동안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
김 씨는 ‘나눔방’ 여섯 곳을 한 시간 넘게 전국의 문화유산을 슬로우 로드(Slow Road)로 유유자적(悠悠自適) 둘러보며, 2000년 초 K-pop으로 시작한 한류와 K 방역으로 최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의 저력이 바로 선조들이 축적한 ‘전통과 정통’의 문화유산에서 나오지 않는가 생각했다.
-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