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배움의 길을 이끌어간
스승들이
심어 키운 나무
- 영주 소수서원 솔숲,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
개나리, 목련꽃 모두 시들어 떨어진 늦봄, 학교가 온라인으로 문을 열었다. 학생을 건강하게 맞이하는 데에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 달 넘게 개학을 미룬 일은 처음이다. 그나마 비대면 수업이라는 낯선 방식이다. 미생물과의 전쟁에서 단 한 명의 학생도 더 건강하고 훌륭하게 지켜내기 위한 결단이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앞에서 이끌어야 하는 스승의 길은 더더구나 무겁고 힘겨운 길임에 틀림없다.
배움터를 향한 스승들의
헌신과 열정
예전에도 우리의 스승들은 배움의 길에 나선 학생을 키우는 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학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배움터 안팎에 북을 매달아둘 만한 큰 나무를 심어 키우는 소소한 노력은 웬만한 스승들이라면 흔히 하는 일이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배움터의 풍수지리를 꼼꼼히 살피고, 땅 기운의 도움을 받기 위해 수굿이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기도 했다.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4백70년 전인 조선 중종 37년(1542),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설립한 유학자 주세붕(周世鵬, 1494~1554)도 그랬다. 당시 풍기군수를 지내던 주세붕은 훌륭한 후학 양성의 기틀이 될 서원 터를 찾아다녔다. 그의 눈에 가장 알맞춤한 자리로 눈에 들어온 곳이 숙수사(宿水寺)라는 옛 절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절집은 고려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회헌 안향(晦軒 安珦, 1243~1306)이 어릴 적에 글을 읽고 공부했던 곳이다.
주세붕은 이 자리가 한눈에 보아도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안향을 봉향하고 후학을 양성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머뭇거리지 않고 서원 건립에 착수해. 한 해 뒤인 1538년에 서원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서원 맞은 편 연화봉 기슭에 늘 흰 구름이 머물고 있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했다. 이어서 더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도야할 터전을 닦기 위해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서원전(書院田)을 마련하면서 서원의 기초를 닦았다. 이를 통해 곧 향촌의 풍속을 널리 교화하려는 데에도 생각이 닿았다. 이즈음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11대손인 안현(安玹)의 적극 지원으로 백운동서원은 주세붕이 애초에 생각했던 규모 이상으로 넉넉한 기반을 갖추었다. 이어, 1550년에는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서원 건축물은 완성됐지만, 문제가 있었다. 주세붕의 눈에는 터의 땅 기운이 약해 보였다. 어떻게든 땅 기운을 북돋워야 했다. 깊은 생각 끝에 주세붕은 서원 입구에 숲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른바 비보림(裨補林)이다. 주세붕은 기왕에 심을 나무라면 배움의 길을 닦는 유생들의 표상이 될 나무를 심는 게 좋겠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렀다. 결국 주세붕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학문의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할 만한 나무로 소나무를 생각했다. 마침내 주세붕은 서원으로 들어서는 유생들의 마음을 정화할 요량으로 서원 입구에 여러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지금까지 소수서원의 입구를 지키는 솔숲이다.
주세붕이 처음 심었던 소나무는 무려 천 그루나 된다고 하지만, 모두 온전하게 살아남은 건 아니다. 세월이 지나며 대개의 나무는 수명을 다해 스러졌다. 이 숲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소나무 가운데에 오래된 나무라고 해 봐야 대략 2백 년 정도 살아온 나무로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수명을 다해 스러지면 사람들은 그 곁에 한 그루의 소나무를 더 심었다. 또 더러는 저절로 떨어진 솔방울이 흩어지며 뿌리를 내리고 새 생명의 싹을 틔운 나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림잡아 150여 그루쯤 되는 소나무는 수령이 들쭉날쭉해 보인다. 크고 작은, 늙고 젊은 나무들이 서로 어울리며 애면글면 살아온 끝에 솔숲은 더 아름다운 숲으로 새로워졌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어우러지면서 소수서원 솔숲은 마침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이 됐다. 처음 나무를 심을 때부터 이 땅의 학자들을 올곧게 키우려는 마음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숱한 학자들의 마음을 다스려온 숲의 나무라는 생각에서 사람들은 머뭇거림 없이 이 숲의 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02_소수서원 입구의 아름다운 솔숲 가장자리의 아담한 정자 경렴정 곁에 서 있는 늙은 은행나무
다시 살아나 신비로운 은행나무가 자리한
‘오산 궐리사
터를 닦은 것만으로 안도할 수는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돋우고, 학습 과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선조들은 여러 방법을 썼다. 그 가운데에도 대표적인 것이 북을 치는 일이었다. 북을 쳐서 학동들이 모여야 할 시간을 알렸을 뿐 아니라, 학습의 시작과 마침의 시간도 알렸다. 스승들은 북소리를 더 효과적으로 학동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게 하기 위해 높은 곳에 북을 매달아야 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것이 다시 나무였다.
학교의 북을 매달기 위해 나무를 이용한 사례는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매우 특별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특히 북을 치며 면학 분위기를 돋우던 스승이 죽음에 이르자 따라서 죽음에 들었다가 무려 250년 만에 다시 살아난 특별한 나무가 있다. 바로 경기도 오산시의 궐리사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그런 나무다.
현대 과학에서는 250년 동안 죽어 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과연 과학만으로 나무의 신비를 가름하는 게가당한 일이기나 한가. 이 신비로운 은행나무를 빼놓고는 오산 궐리사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궐리사에서 이뤄지는 모든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산 궐리사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궐리사(闕里祀)는 유학(儒學)의 시조인 공자(孔子, BC 552~BC 479)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궐리사는 우리나라에 두 곳이 있다. 충남 논산과 경기 오산이다.
오산 궐리사는 조선 중종 때 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 공자의 64대손 공서린(孔瑞麟, 1483~1541)에서 그 역사가 비롯된다. 공서린은 이십 대 중반인 1507년에 생원을 시작으로 홍문관수찬을 거쳐 마흔이 채 되지 않은 1519년에 좌승지 벼슬까지 올랐지만, 기묘사화 때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반역의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공서린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어지러운 조정의 벼슬살이를 떨쳐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훗날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때 지은 서당이 궐리사의 시작이다.
궐리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은행나무
서당을 지은 뒤, 공서린은 큼지막하게 잘 자란 은행나무를 골라 강당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나뭇가지에 북을 매달고, 학동을 불러 모으거나 면학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과 마찬가지로 공서린에게도 은행나무는 후학 양성에 꼭 필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후계 양성과 관련하여 내로라할 만한 업적을 내놓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그의 강당과 주변은 돌보는 이 없는 폐허로 바뀌었고, 그가 심은 은행나무도 주인의 운명을 따라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학문 연마의 소임을 이끌어 줄 주인을 잃고 생명의 끈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로부터 250년쯤 뒤의 어느 날, 죽음에 들었던 은행나무가 기적처럼 소생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죽어 꼼짝도 하지 않던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홀연히 새잎이 싹을 틔웠고, 창졸간에 바짝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생기가 돌았다. 마을 선비들은 나무의 돌연한 생장을 들여다보며, 이는 필경 마을에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예언했다. 선비들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정조 즉위 16년 즈음의 일이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 마을이 공자의 후손인 공씨 집성촌이며, 중종 때의 선비 공서린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던 서당 터도 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더불어 공서린의 서당 앞에서 자라다가 그의 죽음을 따라 함께 죽은 나무 한 그루가 다시 살아나는 중이라는 신비로운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정조는 공자의 후예가 후학을 양성하던 유서 깊은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경기 감사와 화성 부사에게 폐허의 터를 정비하고, 그 자리에 공자의 성묘(聖廟)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공자의 사당을 지으라는 이야기다. 얼마 뒤 임금의 지시에 따라 착공한 공자의 사당이 완공되자 정조는 ‘궐리사’라는 이름의 사액을 손수 내려보냈으며, 마을 이름도 공자의 고향인 중국 곡부현 궐리(闕里)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궐리’로 고쳐 부르라고 했다. 그때까지 이 지역의 마을 이름은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華城府 中逵面 九井村)이었다.
03_죽음의 터널을 지나서 생명의 끈을 이어간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의 자태
04_오산 궐리사 은행나무의 줄기 부분
민족 정신문화 부흥의 상징으로
뿌리내리다
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지만, 더 기특한 것은 나무의 소생이다. 큰 나무 아래에 씨앗이 떨어졌다가 나무가 죽은 뒤에 싹을 틔운다는 것이 그리 별다른 일은 아니다. 그러나 2백50년이라는 긴 시간 전에 죽은 나무가 다시 싹을 틔웠다면, 숨도 쉬지 않고 2백 년 넘게 땅 속에서 소생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여서 놀라울 수밖에 없다.
죽음의 곡절을 딛고 다시 융융하게 일어선 궐리사 은행나무는 처음 이곳에 뿌리 내린 때부터 500년의 세월 동안 공자 정신의 상징이자 화두로 살아왔다. 곡절 속에서도 나무는 17m까지 제 키를 키워 올렸고, 줄기 둘레는 5m 가까이에 이른다. 굵은 줄기가 솟아오르면서 모두 15개의 크고 작은 가지로 나뉘어 솟구친 나무의 모습은 여느 노거수 못지않게 장한 자태다.처음에 나무는 사람이 들고나듯, 자신에게 생명과 삶의 뜻을 부여해 준 사람과 함께 명(命)을 같이 했지만, 세월의 한을 붙들어 안고 뿌리만으로 애면글면 살아남았다. 오랜 세월 동안 땅속 깊은 곳에서 움츠렸던 뿌리만으로 버텨왔던 나무는 다시 태어나 3백 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가히 우리 정신문화 부흥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의 들고남을 오롯이 지켜본 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듯, 앞으로도 더 오래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