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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뿌리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머문 고택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더불어 종손 부부가 살고 있다. 후손들은 예로부터 서계종가에서 전해 내려오며 지금도 다른 종가에서 보기 어려운 제사음식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사치와 허례허식을 개선할 것을 당부한 박세당의 유훈을 기리고 있다.
실학자 집안의 음식문화,
서계 박세당 종가
실사구시의 전당, 서계 종택
서계 종택이 자리한 의정부 장암은 요즈음, 과거와 달리 교통 여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처럼 세월의 변화를 예견하고 터를 잡은 서계의 명안(明眼)이 돋보인다. 종택 마당의 300년이 넘는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우뚝하니 서 있다. 수락산을 병풍 삼은 사랑채에 서면 도봉산의 만장봉, 선인봉, 자운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락산을 배경으로 도봉산까지의 넓은 들을 정원 삼은 탁견에 절로 감탄이 난다.
종택은 박세당 자신이 자연과 벗 삼으며 평생 추구한 실사구시의 실천 공간이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이곳에 은거한 지 10년 만인 1676년 사랑채에서 농서인 〈색경(穡經)〉을 저술했다. 집권 세력이 임란과 병자호란 후에도 여전히 유교적 공리주의와 이상을 추구하였지만, 서계는 농경과 실사 등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 땅에 종택이 자리하지 않았다면 상계동이나 의정부처럼 아파트촌으로 변했을 곳이다. 어쩌면, 전통의 마지막 보루인 종가를 시민들이 경험할 기회조차 없을 뻔했다. 주변의 변화되어가는 환경에 그나마 종가 덕택으로 이만큼이라도 옛 모습을 지탱해오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서계 선생은 평소 검약과 실천을 중시했다. 서계의 가르침은 제사와 손님상 차림 등 후손들의 삶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계 종택을 40년 가까이 지켜오고 있는 김인순 종부는 “우리는 옛날부터 이 근처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들로 먹고 살았어요. 처음 시집와서 3천 평이나 되는 농사를 지었으니까. 철철이 들에서 나는 것들로 밥상을 채웠어요”라고 한다. 이러한 집안 내력은 서계가 후손들에게 “네 먹거리는 네 손으로 농사지어라”라며 남긴 유훈의 실천이다.
특히, 서계 선생은 타계하기 6년 전인 1697년 자손들에게 일생의 가치관을 담은 『계자손문(戒子孫文)』, 즉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매사에 조심해서 스스로 명을 단축하는 일이 없도록 근신하고, 형편에 맞게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사치하지 말 것, 『논어』의 가르침에 따라 충(忠)과 신(信)을 중심으로 매사에 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행실을 행하며, 경서와 역사책을 읽어 과거와 현재를 소통할 수 있는 선비가 되고, 글을 소리 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히며, 『중용』에 있는 바와 같이 계속해서 배우고 물으며 분별함과 행동을 실행하는 데 있어 두텁고 성실하게 하며, 마지막으로 형제간에 우의를 돈독하게 하여 집안에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등이다. 자손들에 대한 서계의 이러한 경계와 가르침은 종가 후손들은 물론, 현대인들이 교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불천위 제사에 담긴 검약과 실용의 미학
이러한 서계 선생의 가르침은 제사 음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계 종가는 박세당과 그의 부친인 하석(霞石) 박정(1596~1632) 두 선대를 불천위(국가에 공로가 있는 경우 4대째 후에도 계속 제사)로 모시고 있다. 서계 종가는 두 불천위 제사를 각각 모셔왔으나, 근래에 한꺼번에 모시고있다. 바쁜 후손들을 위한 배려다. 제삿날 또한 후손들이 참여하기 편리하도록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지내다 10월 9일 한글날로 옮겼다. 한글날이 휴일에서 제외되자 다시 10월 3일 개천절로 옮겼다.
지난해 10월, 서계 종가의 불천위 제사를 참관하기 위해 종택을 찾았다. 종손 박용우의 안내로 사당에 들어서자 서계와 부친 박정을 위해 차려진 제사상은 서계 선생이 자손들에게 내린 “제사 음식에 사치하지 말라”는 말을 실천한 그대로였다. 정갈하고 간결하며 화려하지 않고 적은 양을 올린 것이 눈에 띈다.
불천위 제사상은 칠과, 삼포, 삼적, 삼전, 생간납, 삼탕, 삼색 나물, 편(떡), 잡채, 식혜, 메, 면, 침채(배추나 오이를 활용한 나박김치 종류), 간장, 초간장을 올린다. 제수는 제사 후 음복할 때 후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별도로 금하는 양념이나 재료는 없다. 주목할 만한 것은 생간납(소금으로 씻은 간, 천엽과 배를 채 썰어 준비)처럼 유교적 가치관을 반영한 음식과 더불어 잡채, 편육 같은 일상음식도 오른다. 경북 안동지역에서 외지인들이 제사 음식을 시식할 수 있도록 〈헛제사밥〉을 관광상품화한 사례에 비추어 첫 인상에 서계 종택의 제사 음식도 충분히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계 집안의 제사 음식 특징 중 하나는 생간납, 잡채, 편육 같은 음식이다. 김인순 종부는 제사음식에 생간납을 올리는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불천위 선비는 선비 중의 선비인 ‘혈식군자(血食君子)’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제사는 ‘혈식(血食)’, 즉 날것을 올리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 된다”고 한다. 아마도 오늘날까지 종묘제례에 날고기를 올리는 전통으로 보아 불천위 제사에도 날것을 올렸던 풍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서계는 장례나 제사상 차림에 사치와 허례허식을 개선할 것을 구체적으로 주문하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동요되지 말고 대대손손 지키고, 특히 3년 상식(빈소의 제상에 올리는 음식)을 금할 것을 주문하면서 “비록 나를 위해서라도 훈계를 어겨 제사를 지낸다면 귀신이 있더라도 어떻게 너희의 밥을 흠향하겠느냐”라고 하여 검약과 실용적 삶을 강조했다.
03_ 서계종택 불천위제사(2019년 10월 3일)
스토리와 로컬 푸드의 전형, 서계 종가 상차림
최근 종가에 대한 관심이 많은 관계로 서계 종택은 언론 취재, 서계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와 답사단, 일반인 등 한 해 수천 명이 방문한다. 어느 집안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보통 마음가짐으로는 부담되고 어려운 일이다. 김인순 종부는 “집안에 사람 오는 것을 싫어하면 종부의 삶은 고달프다. 종택을 방문하는 사람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있는 반찬에 밥 한술 먹고 갈 수 있게 준비하는 마음이 중하다”고 한다.
서계 종가는 항상 농사를 지어왔으므로 쌀이며, 채소, 양념류 등 모든 친환경 식재료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로컬푸드로 유명하다. 이런 연유로 미식가,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이야기는 현 종택은 의정부에 있지만, 친정어머니는 황해도, 시어머니는 개성으로 모두 이북이 고향이다. 위도상으로 비슷한 중부지역의 서해와 내륙의 음식 솜씨가 두루 전승되고 있는 점이다.
보쌈김치, 알타리무김치, 백김치, 두릅장아찌와 오가피장아찌, 녹두전과 빈대떡, 되비지탕, 고사리나물 등 정갈하면서도 색상과 맛, 영양을 고려한 한상차림이다. 찬품 중에서 보쌈김치와 되비지탕, 빈대떡은 대표적인 이북 음식으로 서계 집안 음식 전통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김인순 종부가 즐겨 하는 보쌈김치의 배추는 개성배추를 사용한다. 개성배추는 서울 배추보다 속이 성글고 길이가 길어 보쌈에 적합하다고 한다. 속이 뻑뻑하지 않고 통이 크지 않으면서 배춧잎이 길어 채를 많이 썰 수 있는 이점을 활용한 지혜다. 되비지탕은 황해도 향토 음식으로 유명하나 이북 전 지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재령평야의 곡창지대인 황해도는 콩을 직접 갈아 만든 되비지로 비지찌개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서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비지로 사용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이 역시 황해도 출신 친정어머니의 솜씨를 물려받은 전통이다.
종가음식과 ‘한국의집’ 상생
2020년 세계는 코로나19로 엄청난 사회 경제적 손실에 직면해 있다. 전통음식과 공연, 전통혼례 등 생활문화를 보급하는 ‘한국의집’의 어려움도 예외가 아니다. 서계 종택을 비롯한 종가의 제례와 음식문화를 향후 ‘한국의집’이 주도적으로 활용, 보급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때다.
1981년 2월 개관한 ‘한국의집’은 궁중음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음식은 지역과 시대,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다르고 취향이 제각각이다. 현재 ‘한국의집’ 음식은 궁중음식 기반의 철학적 가치를 부여해오고 있으나 개별 찬품 하나하나의 스토리 전개는 취약하다. 신선로(열구자탕), 구절판과 오절판, 근래에 개발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효종갱(曉鐘羹-새벽에 먹던 국) 등 일부를 제외하면 마땅한 스토리 전개에 한계가 있다. 시각적으로 깔끔하고 저자극의 건강한 음식은 분명하나 질박하면서도 내면의 깊은 맛과 풍미,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실록과 의궤 등을 토대로 재현하고 있으나, 궁중음식은 오래전 우리네 삶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문화의 연속성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집안 대대로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종가음식은 전통을 연속적으로 변화, 발전시켜온 장점으로 인해 실생활과 단절되었던 궁중음식의 미비점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궁중음식을 구성하는 구절판, 열구자탕(신선로), 너비아니구이, 조미선 등의 주 찬품과 서계 종가의 종가음식 중 개성배추를 곁들인 보쌈, 되비지탕, 두릅장아찌와 오가피장아찌, 녹두전과 빈대떡, 침채 등을 융합하는 방법이다. 궁중음식의 품격에 종가, 토속음식의 질박함과 깊은 맛을 더하여 현대인들에게 실용적인 음식으로 즐길 수 있는 지혜를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사의 걸출한 실학자 박세당의 삶과 철학적 가치를 인용, 스토리로 재구성하여 현대인들의 미식 가치를 격상시켜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04_ 서계종가 손님상차림 찬품(고추부각, 수삼채무침두부조림, 편육)
05_ 서계종택 전경
-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