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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근대 역사 산책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한국 영화 101주년의 영광을 찾아
“미국에는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 제 심장인 충무로의 모든 필름메이커와 스토리텔러와 이 영광을 나누고 싶다.” 이는 제92 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에 올랐을 때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을 담당한 한진원 작가의 각본상 수상 소 감이다. 그의 말대로 충무로는 명실공히 한국영화사의 살아있는 현장이자, 지금도 기능하고 있는 영화산업의 메카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많은 영 화사가 서울 강남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등으로 옮겨가면서 위상이 예전만 못해 보이지만 그래도 충무로는 충무로다.
분투 속에 발전해온 한국 영화
영화인들에게 ‘충무로’라 불리는 곳은 거리가 아니라 ‘구 역’이다. 중부경찰서와 세운상가, 그리고 남산스퀘어빌 딩 안쪽의 네모난 25만 평방미터의 공간 말이다.
이 일대가 충무로라 불리게 된 것은 구한말에서 일제 사이 일본인들의 주요한 주거지이자 상업가로 이용이 되다 보 니 그 기운을 누르자는 차원에서 광복 뒤 이름을 바꾼 결과 다. 마치 일본 공사의 성을 따 다케조에마치라 불리던 곳을 최초의 순국열사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를 따 충정로로 바 꿨듯이. 그러고 보면 한국 영화의 발전사에 있어 일본이란 존재는 싫든 좋든 부정하기 어려운 요소다. 식민지라는 시 대적 상황은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 이 윤백남 감독의 <월하(月下)의 맹서>였다. 약혼녀 정순 (이월화)이 주색잡기에 빠져 노름방에서 몰매를 맞은 약혼 남 영득(권일청)을 정성껏 간호해 되살리고, 월하의 아버 지는 모아둔 돈으로 영득의 빚을 갚아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1923년 저축을 장 려하려고 만든 내선일체 홍보용 영화였다. 제목의 ‘맹서’라 는 단어도 그렇거니와 전국을 돌며 ‘무료 상영’했다는 점에 서 숨은 의도가 뻔히 보인다. 실제로 독일 나치스가 라디오 를 이용해 정권을 선전할 때, 일제는 영화를 통해 식민통치 를 이롭게 했다.
조선총독부 내에 ‘활동사진반’과 ‘이동영사반’을 두고 체제 홍보를 위한 영화 제작과 지방 순회 상영을 적극적으로 추 진한 것도 그때였다. 조선총독부의 영화정책을 연구해온 호남대 복환모 교수에 따르면, 이들 조직이 생긴 1920년부 터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까지 18년 동안 무려 679종의 영화가 만들어져 4,733차례나 상영됐다. 영화는 한 번에 여러 명이 볼 수 있는 데다 문맹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내용을 소화할 수 있기에 체제 선전에 그만큼 효과적인 수 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로 일깨운 민족정신
하지만 모든 것이 일제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 “미국에는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 제 심장인 충무로의 모든 필름메이커와 스토리텔러와 이 영광을 나누고 싶다.” 이는 제92 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에 올랐을 때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을 담당한 한진원 작가의 각본상 수상 소 감이다. 그의 말대로 충무로는 명실공히 한국영화사의 살아있는 현장이자, 지금도 기능하고 있는 영화산업의 메카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많은 영 화사가 서울 강남과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 등으로 옮겨가면서 위상이 예전만 못해 보이지만 그래도 충무로는 충무로다. 다. 조선인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키노드라마 <의리적 구 토(義理的仇討)>의 성공으로 조선인 중심의 영화 제작도 활력을 띠어 갔다. 임성구가 이끌던 혁신단(革新團)이 <학 생절의(學生節義)>를, 이기세가 이끌던 문예단(文藝團)은 <장한몽(長恨夢)>을 제작했다.
일제 강점 하에서 한국영화 제작이 이어질 수 있던 것은 다 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영화 계에서 한국인 최초로 극장사업, 즉 종로 단성사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영화제작에 재투자한 박승필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승필은 촬영팀을 두고 <장 화홍련전> 등의 영화를 자체 제작하게 하는 한편, 이필우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영화제작기술을 배우게 했고, 1927년 나운규가 설립한 ‘나운규프로덕션’ 등에 대한 재정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예 항일운동에 나서는 영화인도 있었다. 나운규가 제작 한 영화 <들쥐>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데뷔한 이래 1930년부 터는 감독으로도 활동한 윤봉춘이 대표적이다. 나운규와 간 도 명동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그는 영화인의 삶을 살기 전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청진형무소에서 6 개월을 복역했는가 하면, 1923년에는 아예 대한독립군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다시 1년 6개월간 옥살이했던 인물이다. 영화계에 투신한 뒤로도 그의 민족정신은 사라지지 않았 다. 1942년 친일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 가입 제의를 받은 뒤 거부 의사를 밝히고 낙향해 버린 이가 윤봉춘이었다.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일제 군국주의 선전영화 제작에 참 여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윤봉춘의 행동은 쉬운 일이 아 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해방 뒤에는 <윤봉길 의사 >를 비롯해 <3·1 혁명기>, <유관순>, <애국자의 아들> 등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들과 <처녀별>, <논개>, <한말 풍운(韓末風雲)>, <민충정공(閔忠正公)>, <황진이의 일생> 등 민족의식이 충만한 영화 수십 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01_1966년 영화인협회 회장이었던 윤봉춘 영화감독
‘한국영화의 메카’ 충무로의 탄생
사실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중심이 충무로는 아니었다. 극장들이 몰려 있는 종로와 을지로 일대가 보다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영화의 중심이 충무로로 바 뀌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인 1957년경이었다.
명동에 위치하던 영화제작사 15~16개가 충무로로 이전하 면서 ‘한국의 할리우드’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제작 자 변순제가 충무로에 서라벌영화사를 차린 것이 시초였 다. 거기에 1956년 문을 연 대한극장을 비롯해 1957년 명보 극장, 스카라극장과 국도극장 등 많은 극장이 연달아 개관 하며 충무로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게 됐다. 때마침 정부는 1958년 한국 문화의 정수 중 하나로 알려진 에밀레종, 즉 성 덕대왕 신종을 활용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대종상을 만들어 국산 영화 육성과 진흥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 러면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충무로는 그야말로 한국영화 의 메카로 등극하게 된다.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 는 충무로역 구내 벽에 조각돼 있는 대종상 부조는 그 역사 에 대한 헌사가 아닐까 싶다.
제작사들로 밤낮없이 북새통을 이뤘던 곳도 충무로였다. 당시 충무로는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경부터 다시 통 행금지가 시작되는 자정까지 영화 촬영팀들이 전국으로 출발하고 집결했던 영화 제작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다. 더욱이 밤샘작업을 하다 집에 가지 못한 영화인들이 많았 기에 어림잡아 60~70곳의 여관이 성업했는데, 작가와 감 독은 시나리오 작업하느라 주로 동신여관을, 스태프와 단 역 등은 숙소로 대신여관과 태창여관 등을 애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감독들은 벤허다방에, 액션배우들은 스타다 방에, 스태프들은 청맥다방 등에 모여 영화를 위한 논의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물론 충무로의 영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로라하는 극장과 영화사들 덕에 인쇄업도 성 황을 이뤘다. 영화 전단을 찍기 위한 인쇄소들이 충무로 를 중심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1984년 을지로 재 개발로 인해 이곳에 있던 인쇄업체 500여 곳이 충무로로 이전하면서 충무로 인쇄 골목은 전에 없는 성황을 구가 할 수 있었다. 사진 스튜디오와 필름 현상소도 빼놓을 수 없다. 배우 프로필 사진을 찍고 광고 촬영을 하던 작가들 의 작업실이 몰려 있어 사진과 충무로는 떼려야 뗄 수 없 는 관계에 있었다.
02_단성사 터
03_충무로 인쇄골목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영광의 흔적들
지금이야 인근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바람에 2000년대 초 반엔 강남으로, 지금은 파주 출판도시로 많은 영화 제작사 들과 관련 기업들이 옮겨가면서 당시의 그 여관과 다방 등 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충무로 한쪽 인현시장 주변에 지금도 값싸고 질 좋은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해 어렴풋하 게나마 당시를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한국영화배우협회는 충무로에 있고, 영화 홍보회 사들도 여러 곳 영업을 하고 있으며 영화 포스터를 찍는 인 쇄소들도 남아있어 충무로의 위상이 격하되었다고 말하 기 어렵다. 한국 영화사에 있어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니만 큼 지금도 그 역사를 대변하듯 대한극장이 굳건히 관객과 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거기 접해있는 충무로역은 내부 벽화 자체가 영화 포스터이자 영화사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충무로역 지하 1층에 있는 ‘오! 재미동’이라 불리는 충 무로영상센터에 가면 각종 영화 DVD를 비롯한 아카이브 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과 독립 예술영화 상영관도 있다. 독립 영화인을 위한 편집실도 무료로 이용 가능하고 장비 도 대여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 들을 위해 열려있는 곳이 또한 충무로영상센터이고 나아 가 충무로다. 그런 충무로의 의미를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2013년 서울시가 충무로 일대를 서울미래유산에 등재한 것은 언뜻 봐도 타당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영화 <기생충>의 쾌거는 과거 충무로를 누비 던 영화인들의 저력이 100년간 차곡차곡 쌓인 결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멀티플렉스형 극장의 약진과 함께 예전에 비해 찾는 이가 적어진, 그러나 지금도 여전한 영광의 흔적 들을 간직하고 있는 충무로를 걸으며 한진원 작가의 수상 소감을 다시금 떠올린 이유다.
-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