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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
천년 정신의 길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천년의 땅 천년의 길, 코로나를 벗어나 '경주 남산'을 오르자
경주 남산은 신라의 상징이자 문화의 보고다. 서라벌을 세운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부터 포석정에서 신라가 망할 때까지, 천년 역사의 시작과 끝도 남산자락이다. 태초에 돌산이던 남산은 신라인들의 신념과 노력으로 다양한 얼굴의 석불과 마애불, 탑을 간직한 부처의 나라가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남산에는 불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그야말로 보물창고를 드나드는 기분으로 오르내리며 신라인들이 새긴 천년의 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02_삼릉계곡 소나무 숲길
03_마애관음보살입상
04_석가여래좌상
05_배동 석조여래입상
06_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머리없는 부처)
신라 불교인들의 이상세계, 경주 남산
경주 남산은 원래 ‘금 자라’, 금오산(金鰲山)이다. 월성에서 바라보면 마치 자라가 고개를 들이미는 모습이다. 선덕여왕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도리천으로 여긴 진산(鎭山)인 낭산(狼山)의 남쪽산이다. 1천810만㎡(540만 평)의 산에 선사유적(21)부터 왕릉(13), 절터(150), 불상(129), 탑(99) 등 694점의 유산이 산재한 노천 박물관이다. 세계문화사의 첫 사례로 중국 돈황석굴과 견줄만하다.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남산 소나무 옆 두리뭉실한 바위가 갑자기 부처가 되고/ 흐르던 시간이 소리 없이 멎어서/ 신라로 돌아간다./ 천년! 부처는 그렇게 앉아 계시고/ 천년! 부처는 그렇게 서 계실 것이다.(이하 생략)”라고 천년의 땅 경주 남산을 시로 읊은 바 있다.
남산 길은 여러 갈래다. 경주남산연구소가 추천하는 ‘삼릉에서 용장까지’, ‘동남산 가는 길’, ‘칠불암을 올라 천룡사로’ 등 7개 탐방 코스는 무수한 볼거리와 이야기를 간직한 보물찾기다. 이 길 가운데 가장 많은 명품을 친견할 수 있는 여정은 서남산주차장을 출발해서 상선암과 바둑바위, 상사바위, 금오봉을 지나 신선암과 칠불암을 거쳐 동남산 염불사지 주차장으로 가거나 용장계곡으로 내려가 삼층석탑, 마애불을 감상하며 용장주차장에 이르는 길이다.
6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 남산자락은 등산객, 유적답사 참가자, 불교 신자 등 방문객들로 분주했다. 삼불사 옆 배동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3호, 7세기 후반)이 명랑하고 천진스러운 어린아이 모습으로 반긴다. 오른쪽 망월사를 지나 300여 미터를 가면 삼릉계곡 입구다. 8대 아달라왕(154~184), 53대 선덕여왕(912~917), 54대 경명왕(917~924)의 삼릉(사적 제219호)이 소나무 숲에 쌓여 운치를 더한다.
나무판으로 잘 정돈된 솔 숲길을 오르면 석조여래좌상과의 첫 대면이다. 1964년 발굴되어 현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머리가 없고 무릎과 손 모양이 파손되었으나 당당한 가슴, 탄력 있는 조각 솜씨 등 8세기 중엽 전성기 작품이다. 해설사 이야기를 들어 보니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나 추가 고증이 필요하다.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돌기둥 암벽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바위에 불상을 조각한 마애불은 전국적으로 200여기다. 일찍이 큰 바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과 경이로움이 불교 조각으로 변용되어 마치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는듯한 모습이다. 154cm 여인 모습의 이 마애불은 입술에 붉은색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탐방객들에게 ‘미스 신라’로 불리고 있다. 미스 신라를 뒤로하면 골짜기의 왼쪽 넓은 바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선각으로 정교하게 새겨놓은 불상을 만난다. 선각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은 동쪽에 설법 중인 석가모니삼존을, 서쪽에 아미타삼존을 새겨 현생과 내세를 재현했다. 세월 탓에 마모가 심하다. 연이어 바위와 개울을 지나 선각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10세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8세기 후반), 선각마애불(9세기)을 먼발치서 바라보면 이곳이 진정한 불국토임을 깨닫게 한다. 신영훈 선생은 “경주 남산은 신라 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이기도 하고 수미산이기도 하다. 불국사에 사바세계와 극락세계 연화장 세계를 구현했듯이 남산을 영산으로 조형하였다”고 평했다. 신라 지킴이 윤경렬 선생은 남산을 연구한 책 이름을 『겨레의 땅 부처의 땅』으로 명했다
겨레의 땅 부처의 땅이 실현된 곳
가파른 길을 올라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오아시스처럼 상선암이 펼쳐진다. 약 90년 전 옛 절터에 세워진 암자다.
상선암을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경주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바둑 바위가 자리해있다.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곳으로 『동경잡기』(1669)에는 신라 때 옥보고가 거문고를 켰던 곳이란다. 왼쪽부터 멀리 단석산, 벽도산, 선도산 등이 병풍처럼 경주 시내를 감싸고 형산강에 펼쳐진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인들이 왜 경주를 도읍으로 정했는지 짐작이 간다.
금오산 방면으로 오르면 상사바위다. 큰 바위 아래 머리 없는 작은 불상 등 불교와 무속의 습합현장이다. 상사병에 걸린 이들이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며, 신라대부터 후손을 위한 기도처다. 현재는 낙석위험으로 상선암에서 바로 오르지 못한다. 상사바위에서 북서쪽을 내려다보면 드라마 선덕여왕의 첫 장면에 등장하여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마애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이 마치 바위에서 튀어나오는 형상이다. 6m의 거대한 마애불로 바위 신앙과 융합된 사례로, 조각은 신체 표현 등에서 다소 힘이 빠지는 9세기 작품이다.
상사바위에서 금오산 정상까지는 약 800m다. 다시 20여 분을 내려가면 칠불암, 통일전으로 가거나 용장사지로 내려가는 삼거리다. 칠불암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거쳐야 하는 곳이 신선암 보살상이다.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8세기 후반)은 구름 위에 앉은 듯, 돌출한 바위면을 파고 이를 광배삼아 새겼다. 보관을 쓴 모습은 생각에 잠긴 듯 빙그레 웃는다. 발 아래는 천길 절벽으로 중간쯤이 칠불암이다. 토함산을 향한 탁 트인 전경에 탄성이 절로 난다.
바위 길을 내려와 만나는 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은 마애삼존불과 바위기둥 네 곳에 불상이 조각된, 8세기 석굴암 조각 이전의 돌을 다룬 솜씨가 뛰어난 명품이다. 마애불의 본존은 부처의 깨달음 순간을 표현하여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상이다. 둘레길의 동남산 가는 길은 월정교를 벗어나 불곡마애여래좌상(보물 제198호), 탑곡마애불상군(보물 제201호), 보리사 마애석불(경북유형문화재 제193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호),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등 조형미술의 길이다. 아침 해 뜨기 전 산책코스로 일품이다.
07_미륵곡 석조여래좌상 09
08_열암곡마애불(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09_경주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
금오신화의 탄생지 남산 용장골
용장골은 신라 경덕왕대 고승인 태현(太賢)과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1435~1493) 이야기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는 태현이 꿈에 장륙존상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장륙존상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97호)을 비롯하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지, 설잠교 등이 곳곳에 자리한 명품 계곡이다. 길은 무척이나 가파르고 험하다. 자칫하면 천 길 낭떠러지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후 불교에 심취해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한다. 31세에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며 대표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니 문학사와도 인연이 깊다.
최근 경주 남산은 용장계곡 옆 약수골에서 발견된 불상 머리(佛頭)로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머리가 없던 석조여래좌상의 형식이 바로 경주 이거사지 출토품으로 알려진 청와대 녹지원 불상과 동일한 형식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을 둘러보려면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내남면의 열암곡이다. 샛갓골 주차장에서 30여 분을 올라가면 열암곡 석불좌상(경북유형문화재 제113호), 2007년 5월 22일 발견된 앞으로 넘어진 마애불과 만난다. 전체 5.6m의 큰 규모로 불상 자체가 지진 등으로 인해 쓰러져 바닥과 불과 5cm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훼손을 면했다. 경주시가 2018년부터 약 70억 원을 들여 마애불을 세우고자 준비 중이라 또 한 점의 명품이 기대된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과 단체여행이 어려운 시기, 우리 땅 우리 유산이 가득한 경주 남산 배낭여행을 추천한다. 탐방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054-777-7142)를 이용하면 풍성한 자료와 함께 코스별 무료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삼릉에서 용장’까지 경주 남산 둘러보기
귀중한 문화유산의 보물창고, 경주 남산
경주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 4개소, 절터 150개소, 불상 129구, 탑 99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700여 점에 이르는 문화유적이 온 산에 흩어져 있으나, 찾아가기가 힘들었다. 이에 ‘경주남산연구소’에서는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에 경주 남산의 문화유적을 코스별로 문화유산해설사가 동행하는 무료 답사를 통해 우수한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세계인에 전하고 있다. 산행을 통해 남산의 경관을 둘러보고 신라 천년의 역사가 담긴 불교 유적의 백미를 직접 둘러보는 재미를 느껴보자.
추천코스
서남산주차장 ⇢ ① 삼불사 ⇢ ② 삼릉 ⇢ ③ 선각육존불 ⇢ ④ 선각마애불 ⇢ ⑤ 상선암 ⇢ ⑥ 바둑바위 ⇢ ⑦ 금오산 정상 ⇢ ⑧ 삼층석탑 ⇢ ⑨ 용장사지 ⇢ ⑩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 용장주차장
(이미지 설명 왼쪽부터)
석조여래좌상 삼릉 보리사 마애불
-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