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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뿌리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일제의 잔혹한 만행 속에서도 종택과 신위를 지켜내며 지금까지도 불천위 제사를 잇고 있는 학봉종가. 게다가 400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그 명맥을 오롯이 잇고 있는 ‘씨 간장’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종가음식 전승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맛처럼 한결같이 이어지는 전통은 해마다 정성을 더해 더 가치 있게 빛난다.
의병운동의 든든한 자양분, 담양 학봉 종가 400년의 씨 간장
임란부터 구한말까지 오롯한 의병운동 터전
삼월과 팔월은 3.1 운동과 8.15 광복절로 숙연한 분위기다. 담양의 장흥 고씨 고인후 종가는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400년간 구국 항일의 역사다. 구국 정신은 봄비 후 깨어난 죽순처럼 우뚝 솟아났다.
“우리 집안은 구한 말 때 망한 집안이여. 그때는 일제가 무서워 한 곳에 살지도 못하고 조상님 신위만 모시고 이집 저집 더부살이를 해야 했어. 남들 같으면 벌써 고향을 떠났건만 종가라 그러지도 못했어. 일제 경찰이 종택을 불 질러 다 타고 장독만 남았어. 그 장독에 있던 씨 간장이 400년이 된 거야.” 고영준(학봉 종가 종손)의 회고는 질기고 오롯한 집안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고인후 종가는 임란 당시 고경명(1533년~1592)과 둘째 아들 고인후(1561∼1592), 셋째 아들 고종후(1554∼1593) 등 세 명의 순절한 의병장을 불천위로 모신 집안이다. 조선 역사상 아버지와 두 아들이 불천위를 받은 유일한 집안이다. 이러한 충절은 300년 후 녹천 고광순(1848~1907)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 경찰이 종택을 불사르고 종손고재환은 탄압의 후유증으로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자칫 종가의 대가 끊길 위기에서 현 고영준이 20대에 양자로 들어오면서 오늘까지 대를 잇고 있다. 여든 살이 넘은 고영준은 의병장 후손으로 1907년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키며 사용한 불원복(不遠復, 국권 회복이 멀지 않은 강한 신념이 담겨있음) 태극기에 의지해 살아왔다.
학봉 종택은 고래등처럼 크고 화려하지 않다. 1947년에 지은 안채와 사랑채는 평범한 농가다.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키던 해 일제가 종가를 불태운 지 40년 만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화마를 면한 신위와 뒷마당 장독대가 종가 제례와 음식문화 전통의 원천이다. 창평면 유천리 논밭에서 길러낸 제철 식자재로 만든 음식은 임란과 일제강점기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든든한 자양분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400년 씨 간장이 있다.
400년 씨 간장, 종가음식 전승의 맥
학봉 종가 음식은 2017년 9월 7일 서울 모 호텔에서 농촌진흥청 주최로 전국 12개 종가를 초청한 ‘한국 전통종가 내림 음식 프로모션’에서 처음으로 빛을 봤다. 이숙재 종부는 이날 민어탕, 죽순전, 감장아찌, 단술(모주) 등 23가지의 내림 음식을 선보였다. 함께 내림 음식 준비에 참여한 호텔 셰프들은 담양의 땅이 키우고 종가의 손맛이 더해진 죽순나물에 찬사를 보냈다. 신위와 장독 하나가 유일하게 남은 집안이었지만, 그 맛을 기억하고 지켜온 사람이 있었기에 학봉 종가음식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전북 남원 출신의 이숙재 종부는 음식 솜씨 좋은 친정어머니로부터 매작과, 무정과, 양갱 등 조리법을 익힌 후 학봉 종가의 차 종부가 되었다. 일 년 열두 번의 제사 음식과 손님상 차림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봉제사 접빈객에 철두철미하던 시어머니는 3년 후 돌아가셨고 서른 나이에 종가의 종부가 되었다. “이 집안에 와서 내가 한 대를 책임지고 지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힘들었지만 악착같이 살았어요”라며 종부로의 삶을 회고한다.
인생역정과 달리 말수가 적은 종부는 환갑이 넘어 대학에서 다도와 도자기 공부를 마치고 종가음식 전승을 위한 새 삶을 살고 있다. (사)담양죽로차연합회, 담양 죽로문화원 영농조합법인(브랜드명 “다가설”) 설립 등 대나무의 고장에 어울리는 식문화 개발과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한여름 차려낸 종부의 7첩 반상과 다과상은 담양 땅이 생산한 제철 재료와 종부가 이어받은 음식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깃든 문화상품이다.
7첩 반상은 양반가의 전통음식인 보리굴비를 비롯해 떡갈비, 전복초, 참게장, 7절판과 지역 특산인 죽순나물과 각종 장아찌(감, 돼지감자, 오가피, 가죽나물), 백김치와 갓김치, 배추김치 등 진득하고 푸짐하다. 이들 갖가지 찬품들은 나름의 스토리가 풍부해서 음식 이상의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 종가 음식은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같은 조리서나 집안의 문집 등 역사기록과 구전으로 확인된다. 물론 일부 정체성이 불명확한 부분도 있으나 현대인들의 식문화를 풍요롭고 정겹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01_ 학봉종가의 400년 씨 간장을 보존해온 장독
02_ 학봉종가 손님 상차림
03_ 학봉종가 상차림 찬품 보리굴비
04_ 학봉종택 사당
05_ 학봉종택 뒤편의 대나무 숲
06_ 학봉종가 손님 상치림
07_ 학봉종가 다과상
08_ 학봉종가 종손 고영준, 종부 이숙재
09_ 학봉종가 손님 상차림 찬품(떡갈비·죽순채 무침 등)
불의에 굴하지 않은 학봉 종가와 어울리는 보리 굴비
고려 인종 때 권세를 누리던 이자겸(?~1126)은 영광으로 귀양을 간 뒤 해풍에 말린 조기를 맛보았다. 그 맛에 반해 후일 궁중에 진상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의미로 조기를 굴비(屈非)로 적어 보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는 음식 스토리텔링으로 손색이 없다. 어쩌면 일제의 압제에 굴하지 않은 절개를 지닌 학봉 종가의 내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아무리 맛이 있어도 임금 체면에 갈비를 손으로 뜯을 수 없었기에 만들어졌다는 떡갈비는 경기도 광주와 양주, 전라남도 담양과 화순의 전통음식으로 유명하다. 전라도 떡갈비는 유배 온 양반들에 의해 전해졌는데, 650년 전 노송당 송희경(1376~1446)에 의해 전해졌다는 담양 떡갈비가 유명하다. 학봉 종가는 과거 불천위 제사에는 고기산적이나 너비아니를 올렸으나 요즘은 떡갈비를 제사상에 올린다. 지역에 토착화된 식문화를 반영한 예라 하겠다.
담양의 대표 음식인 죽순나물 관련으로는 <시의전서(時議全書)>에 ‘즉슨나물’로 기록된 조리법과 특징이 보인다. 이숙재 종부는 죽순은 특별한 향이 없지만, 식감이 좋아서 모든 요리와 잘 어울린다며 그동안의 조리 경험을 전한다. 특히 시어머니 생전에 죽순밥, 죽순산적, 죽순나물 조리법을 이어받아 손님상이나 제사에도 올린다. 학봉 종가 죽순나물은 소금 간을 하고 들깨즙과 멸치육수로 버무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학봉 종가 상차림 중 부각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숙재 종부의 고향인 남원이 예로부터 부각으로 유명한 것이 인연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의궤나 진연, 진찬 등 음식 관련 기록을 보면 국가를 다스리는 위정자, 특히 국왕이나 왕세자의 경우 강한 양념류가 들어간 음식을 경계하였다. 자극이 심한 음식은 성격을 격하게 하여 군왕으로서 선정을 베푸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학봉 종가의 음식은 담양의 토속음식도 있지만, 궁중에서 사대부로 전승되어온 음식들이 많아 저자극의 과하지 않은 양념을 한 음식이 주류를 이룬다.
오늘날 창평 지역의 엿, 한과는 학봉 종가의 영향으로 확산된 식문화다.담양은 남도의 대표 쌀 주산지로 창평면은 예로부터 쌀을 주원료로 하는 쌀엿과 조청이 유명하다. 1920년대부터 학봉 종가에서 명절에 먹기 위해 만든 것이 시초가 되었는데, 쌀이 귀하던 시절 종가에서 엿 만드는 날은 온 동네가 그 달콤한 맛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국의집 효종갱(조선 최초의 배달음식)과 학봉 종가 음식의 융합
서울은 토박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팔도 이방인들의 도시다. 모 방송국 ‘어머니의 손맛’이 인기리에 소개되듯 누구나 질박하고 꾸밈이 덜한 음식을 갈망한다. 학봉 종가의 음식 찬품과 스토리를 가미한 ‘종가의 도시락’은 도시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소재다.
조선 최초의 배달음식으로 한국의집이 발굴한 효종갱(曉鐘羹)은 최근 마켓컬리와의 납품 계약으로 새로운 전통식문화 시대를 열었다. 이미 개발되어 한국의집과 경복궁 소주방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도슭 수라상과 더불어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식문화 배달에 종가음식을 활용할 묘안이 기대된다.
-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