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문화유산 속 나무 이야기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왕조와 민중의 삶을 지켜본
회화나무
- 창덕궁 회화나무군과 이 땅의 특별한 회화나무
01_조선시대 삼공의 자리를 지키며 창덕궁에서 살아남은 회화나무군
02_늠름하게 하늘로 뻗어오른 당진 삼월리 회화나무의 줄기
예부터 선비의 기개와 품격을 갖추고 사람살이와 가까운 자리에서 긴 세월 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온 회화나무. 때로는 궁궐에서, 혹은 선비의 집 앞에 서, 혹은 감옥터 앞에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역사를 지켜오며 한결같이 꽃 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어왔다. 삶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해 온 회화나무 는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아내고 있다.
궁궐과 숲의 아름다운 조화, 창덕궁 숲
서울의 여러 궁궐 가운데 가장 깊고 아름다운 숲을 간직한 곳으로 우선
창덕궁의 숲을 꼽을 수 있다. 창덕궁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큼 크
고 오래된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은 큰 숲이다.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창덕궁 향나무를 비롯해 제251호 창덕궁 다래나무, 제471호 창덕궁 뽕
나무, 제472호 창덕궁 회화나무군까지 창덕궁 안의 천연기념물은 무려
네 건이나 된다. 자유관람을 허용하지 않으면서까지 궁궐의 건축물과
숲을 온전히 보호한 결과다. 거꾸로 천연기념물 급의 숲을 온전히 보호
하기 위해서 ‘자유관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이
야기할 수도 있다.
창덕궁의 천연기념물 가운데에 가장 최근에 지정한 나무는 〈창덕궁 회
화나무군(群)〉이다. 지난 2006년 4월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했다.
〈창덕궁의 회화나무군〉은 돈화문 안쪽에 들어서면서 길 양옆으로 나란
히 서 있는 여덟 그루의 나무를 가리킨다. 높이가 평균 16m 정도 되고,
대략 4백 년쯤 살아온 큰 나무다.
선비의 올곧은 기개가 담긴 ‘창덕궁의 회화나무군’
〈창덕궁의 회화나무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궁궐 건축의 기준으
로 삼은 중국의 ‘주례(周禮)’에 따르면 임금이 여러 관료와 귀족을 만나
는 장소인 ‘외조(外朝)’의 자리 가운데에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즉
삼공(三公)이 앉는 자리의 표지로 회화나무를 심어야 했다. 창덕궁의
돈화문 주변이 바로 외조의 위치였다. 1820년대 중반에 제작돼 궁궐의
사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동궐도(東闕圖)’에도 이 나무들
이 나온다.
조선 최고의 관료들의 위치를 상징하는 나무로서 〈창덕궁의 회화나무
군〉은 나라 안 최고의 선비들과 함께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한평생을 살
아왔고, 여전히 국가가 살아있는 생물에게 부여하는 최고 지위인 ‘천연
기념물’로 인정받아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누리고 있다.
회화나무는 옛 선비들이 이삿짐 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로 좋아했던 나무
다. 가지퍼짐이 거침없이 변화무쌍하게 뻗어 나가되, 어느 한 군데 도드
라지지 않고 미끈한 나무껍질을 가진 회화나무는 그 생김새가 ‘선비나무’
혹은 ‘학자수’라는 별명에 안성맞춤이다. 잘 자라면 30m를 훌쩍 넘고 가
슴높이 둘레도 10m를 훨씬 넘어설 만큼 오래도록 크게 잘 자라는 회화나
무의 생김새를 옛사람들은 독창적 분야를 개척하는 학문의 길과 같다고
여겨온 듯하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회화나무는 학자, 혹은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
겨져 왔다. 중국의 선비들은 벼슬에 오르게 된 기념으로, 자신의 집 정원
에 바로 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는 회화나
무를 ‘출세목(出世木)’이라고 하고, 때로는 행복을 가져오는 나무라 해서
‘행복수(幸福樹)’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회화나무의 영문 이름도 스콜라
트리(Scholar Tree)인 걸 보면, 나무에 대한 느낌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
은 모양이다.
명성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당진 삼월리 회화나무’
식물분류학이 채 정리되기 전인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회화나무를 느티
나무와 혼동해 쓰인 걸 확인할 수 있다. 회화나무를 가리키는 한자 괴(槐)
가 느티나무를 뜻하기도 하는 때문이다. 특히 한자로 쓰인 옛 시(詩)에서
표현한 괴(槐)는 느티나무일 수도 회화나무일 수도 있어서 헷갈린다. 괴가 가리키는 나무를 구별하려면 할 수 없이 문헌 앞뒤의 맥락을 살펴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남
긴 칠언절구 한 수에도 분류가 어려울 수 있는 괴나무가 나온다.
一病經旬斷酒杯 / 열흘 넘게 병치레하느라 술조차 끊으니
門前不見可人來 /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閑吟鄭子風流作 / 풍류를 담은 정자의 작품을 한가히 읊고
時聽黃鸝韻綠槐 / 때로 푸른 회화나무에서 우는 꾀꼬리 소리 듣는다
정씨 성을 가진 불확실한 누군가(한국고전번역원의 역주에서는 이를
“남행시권을 지은 저자의 성(姓)이 정(鄭)이었기에 이렇게 부르는 듯하
다”고 했다)의 시를 한가로이 읊는 순간, 어디에선가 꾀꼬리 소리가 들려
오는데, 그게 바로 곁에 있는 푸른 나무였다는 것이다.
이 나무를 이행은 괴나무로 썼지만 이 나무를 느티나무가 아니라 회화나무로
짐작할 수 있는 근거는 작자인 이행의 행적 가운데에서 찾을 수밖
에 없다. 이행은 유난히 회화나무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가 손수 심고
정성껏 키운 나무를 여전히 우리가 직접 찾아가 만날 수도 있다.
바로 〈창덕궁의 회화나무군〉의 여러 회화나무 못지않게 선비수로서 명
성에 어울릴 만큼 잘생긴 회화나무다. 〈당진 삼월리 회화나무〉라는 이름
으로 천연기념물 제317호에 지정된 회화나무다. 우리나라 안에 살아있
는 회화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 해도 될 만큼 장하게 살
아남은 나무다.
충남 당진군의 송산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km 남짓 올라가다 보면,
남쪽을 향한 민가 대문 앞에 서 있는 이 회화나무가 바로 이행이 중종 12
년(1517)에 집을 지으며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심은 나무라고 한다.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훌륭한 선비가 나오고, 대문에 심으면 잡귀
의 출입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심은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
기한다.
키가 21m, 가슴높이 둘레가 5.7m나 되는 〈당진 삼월리 회화나무〉는 가
지퍼짐이 무척 화려하다. 2.1m 높이에서 펼친 가지는 사방으로 16~18m
쯤 고르게 펼쳤다. 규모만으로도 최고의 회화나무로 기록할 만하다.
비극의 역사를 함께 버텨온 회화나무
〈창덕궁 회화나무군〉과 〈당진 삼월리 회화나무〉가 선비의 기품을 갖춘
나무라면, 얄궂은 운명을 안고 살아낸 회화나무도 있다. 충남 〈서산 해미
읍성 회화나무〉가 그렇다. 천주교 순교지로 더 많이 알려진 해미읍성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무려 1천 명의 신도가 배교를 강요받으며 순교
한 곳이다. 오래전에 무너져 내린 감옥은 최근에 복원해, 당시의 분위기
를 짐작하게 했다. 바로 그 감옥터 앞에 서 있는 회화나무가 참혹한 운명
을 띠고 살아온 나무다. 그때 천주교 신도들은 감옥에서 끌려 나와서 회
화나무 줄기 꼭대기에 달린 철사 줄에 머리채가 묶인 채, 모진 매질로 고
문을 당하며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 모진 운명을 상징이라도 하듯,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넓게 뻗었어야 할 가지들을 떨군 채 여느 회화나
무와 달리 앙상한 모습으로 남았다. 천주교 신도들의 애달픈 죽음과 함
께 자신의 가지를 하나둘 내려놓은 것이다.
때로는 선비의 모습으로, 때로는 역사의 비극을 간직한 채 묵묵히 오랜
세월을 버텨온 회화나무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위안과 힘이 되
어주고 있다.
03_한여름에 우윳빛으로 피어나는 회화나무의 꽃
04_당진 삼월리 마을 앞들을 내다보며 서 있는 회화나무
05_해미읍성 회화나무의 굵은 줄기
06_가지를 넓게 펼치지 못하고 앙상하게 남은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 글.사진.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