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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우리 문화의 뿌리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01_석계종택이 자리한 두들마을
02_두들마을 낙기대
03_음식디미방
척박함 속에 조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를 탄생시킨, 석계 이시명 종가
경북 영양군이 설립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 내려 보면 고즈넉한 재령 이씨 집성촌이 한눈에 선하다. 마을 앞 시냇가 바위에 새겨진 낙기대(樂飢臺)와 세심대(洗心臺)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의(義)를 저버리지 말고 세상의 권세와 명예를 씻어버리라’는 가르침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닫힘에서 새길을 찾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리는 황해도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석계 이시명 (1590~1674)이 1612년 사마시에 합격 후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 의 난정과 1636년 병자호란을 국치로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 고 은거한 곳이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1640년(인조 18년)에는 영양의 석보(石保), 1653년(효종 4년)에는 영양의 수비(首比), 1672년(현종 13년)에는 안동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도 잘 썼으며, 특히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로부터 이학(理學)을 전수받아 아들 이휘일과 이현일에게 전해줌으로써 주리학(主理學)의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서울에서 차로 네 시간 반 이상을 달려야 도착하는 두들마을은 근대기 의 시인 이병각(1910~1941)을 비롯해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17세기에서 21세기까지의 문(文), 시(詩), 화(畵), 음식 이 융화되어 350년의 전통문화를 꽃피웠다. 흔히들 닫힘과 소통 부재를 문화 발전의 저해요인으로 본다. 이러한 편 견과는 달리 석계종택은 척박한 산중에서 오히려 건강에 좋은 음식 비 법을 찾아냈고, 이를 기록하여 조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규곤시의방, 閨?是議方)』으로 탄생시켰다.
『음식디미방』의 가치를 새롭게 재현하다
현재까지 발굴된 종가의 조리도서는 1540년 유학자 김유(1481~1552) 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주식시의(酒食 是儀)』와 『우음제방(禹飮諸方)』, 『(가제)동춘당음식법』, 18세기의 『온주 법(蘊酒法)』과 석계 종택의 『음식디미방』 등 여섯 종이다. 석계 종택의 『음식디미방』은 장계향(석계의 부인)이 일흔을 넘긴 1670 년경 집필한 현존 최고의 한글 조리서다. 이 조리도서는 1600년대 말 경 상도 지역의 양반가에 전해오던 조리법을 기록하고 있다. 저장 발효식 품, 식품 보관법,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18종) 및 어육류(74종), 각종 술 담그기(51종), 초류(3종) 등 146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조리서 그 자체는 물론, 재현된 음식류로 인해 오늘날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15년 4월 제7차 세계 물 포럼 환영 오찬에는 음식디미방의 전통주인 ‘칠일주’와 ‘감향주’가 공식 건배주로 채택되어 호평받았다. 이외에도 ‘잡채’, ‘어만두’, ‘가제육’ 등 10여 종의 음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평가에 고무된 영양군이 근래 책에 소개된 음 식 중 40여 종을 개발해 상품화했고, 감향주, 유화주 등 전통술을 개발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方文)’이라는 의미를 지닌, 현 존하는 최초의 실증적 조리서다. 우리나라 기록 중 음식과 관련해서는 궁중진연 때 올린 찬품이 포함된 의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의궤는 단 순히 궁중잔치에 진상된 음식만을 나열했을 뿐, 구체적인 조리법이 없 다. 따라서 궁중음식이 사대부로 또 민가로 전승되던 현상을 감안하면, 『음식디미방』은 조선 후기 궁중과 사대부가의 음식 일부를 체계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 조선 시대 궁중연회의 한 부류인 〈기사경회첩〉 상차림에는 『음식디미 방』에 기록된 자라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궁의 음식이 사대부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본 조리서를 통해 궁중음식의 복원 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04_ 석계고택
05_ 2015년 한국의집 음식디미방 재현찬품
06_ 음식디미방의 재현- 다과상
07_ 숭어만두
건강한 로컬푸드를 전하기 위한 석계 종택의 노력
석계 종택 13대 종손 이돈과 종부 조귀분은 현재도 가풍을 잇고 장계향 의 전통음식을 청소년과 일반인에 전승 중이다. 종택과 한국문화재재단 의 인연은 2015년 한국의집에서 개최한 『음식디미방』 행사에서 시작됐 다. 당시 종택의 전통음식을 한국의집 조리사들이 실습·체득하여 일반 에 보급했던 이 행사는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조리법, 재료의 종류와 장류 등 전통기법을 유지하고 있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 켰다.
음식은 집안의 가풍과 사람 됨됨이를 만드는 큰 요소다. 석계 집안이 오 늘날까지 전승해온 음식은 지극히 사림문화 기반의 토속적인 취향이 강 하면서도 건강식이다. 달며 맵고 짠 음식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맛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음식 그 자체가 건강하다는 증거 다. 19세기 이후 한국인은 모질고 힘든 여정을 겪어오면서 이제까지 경 험하지 못한 강한 양념과 자극적인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음 식문화의 개선을 위해서는 옛 방식을 유지해온 종가음식을 기반으로, 현대인의 건강과 치유의 음식문화 재창안이 필요하다.
『음식디미방』의 식재료는 열을 내리고 해독작용을 한다는 동아를 비롯 해 석이버섯, 꿩, 메밀, 숭어, 연근, 산삼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이 다. 오늘날 식재료가 지역과 국가를 넘나드는 관점과는 개념을 달리하 는 로컬푸드의 전형이다. 조귀분 종부는 “요사이 젊은 세대는 퓨전화된 식단 등 서구화된 것을 추종하는데, 자연식품을 활용해 건강을 유지하 는 방식을 권하고 싶다”고 전한다. 특히 “화려한 음식보다 몸에 좋은 것, 현실에 녹아든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관건”이라며 전통음식 전승의 어 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석계 종택은 일반적으로 전래의 음식 비법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리는 경우와 달리 재료와 기법 등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음식을 들고 먹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것의 주인은 정성이라고 생각해 요. 재령 이씨 종부라는 것이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기에 사실 부담스럽 기도 했지요. 훌륭한 조상님 덕분에 음식디미방 레시피에 대한 요리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남들은 부러워할지 몰라도 조상인 장 씨 할머니의 인품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정신적 중압감이 나름 힘 든 점입니다.” 문화유산을 감당해야 하는 중압감을 견뎌 내고 잇는 것은 오롯이 조귀분 종부의 몫이었다. “음식디미방에는 국수, 어육류, 채소류, 주류 등 146가지 조리 비법이 상세히 적혀 있지만, 그림이 없기에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었어요. 수십 번씩 음식을 만들어보아야 했고, 모르는 것은 시골 할머니들에게 물으 면서 하나씩 깨우쳐 왔습니다.” 종부의 이러한 노력으로 완성된 레시피는 일반 보급의 방안으로 밀프랩 처럼 조리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손질한 재료와 양념을 보내주는 방 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젊은 층으로의 확산을 위해 고민할 부분이다.
종가음식과 제례문화의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존이 시급
기록 촬영을 위해 종택에서 준비한 음식디미방 재현 상차림과 다과상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간결함과 맛과 필요한 영양을 고루 갖춘 찬품들로 구성됐다. 동아누르미를 비롯해 숭어만두, 꿩고기를 포함한 오이채와 무, 석이버섯, 숙주나물, 도라지를 활용한 잡채, 꿩고기물김치, 쑥탕은 은은한 색상만큼 건강식이다
세상 변하는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그 변화를 인간의 인체 리듬에 맞게 완급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다. 변화가 느린 종가음식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200여 종가문화의 문화재 지정은 전통에 기반하여 새로운 식문화 발전의 출발점이 될 것 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해 현황조사와 목록화 등 기초 작업이 필요한 시 점이다.
종가음식의 보존 전승을 위해서는 최근 근대문화재 중심의 등록문화재 제도를 식생활 문화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전국의 종가음식을 지방문 화재나 등록 무형문화재로 등재 후 보존 전승의 길을 찾는 적극적 보존 노력이 요구된다. 고궁과 왕릉 등 왕실 문화와 더불어 전통의 큰 축이 사대부 종가문화다. 종묘제례와 제례악, 궁중음식을 이미 무형유산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이 들 유산의 구성 요소인 종가음식과 제례문화의 지정은 당연한 일이다.
08_ 2015년 한국의집 음식디미방 행사-조귀분 종부 시연
09_ 음식디미방 재현 상차림
10_ 동아누르미
11_ 북어보푸라기
-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