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근대 역사 산책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식민지배의 아픔과 욕망,
희망으로 점철된 작은 도시,
인천 제물포
조그만 포구에 불과했던 인천 제물포가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76년부터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통해 부산 외에 원산과 인천의 개항을 관철시켰다. 부산은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워서, 원산은 러시아 견제를 위한 교두보로서, 그리고 제물포는 수도인 한성 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였기에 선택됐다. 1883년 1월, 인구 70여 명에 불과했다는 한적한 어촌 제물 포의 문이 열린다.
01_일본과 청국 조계지 사이를 가르는 계단
02_각국 공원에 있던 세창양행 사무실
03_경인선 개통식
나라 안에 세워진 또 다른 나라, 조계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각국 영사관들이 들어섰다. 항구 근처에는 조 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조계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통상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설정한 치외법권 구역이다. 가장 먼저 조계지를 만든 나라는 일본이었다. 현재 인천 중구청이 있는 곳에 일본 영사관이, 중앙동과 답동 일대의 약 3만㎡에 상업공간 및 주거지가 자리 잡았다. 얼마 뒤 청국도 선린동 지역에 1만6천여㎡의 조계지를 만들었다. 물론, 제물포에 일본인과 중국인만 드나든 것은 아니다. 청국은 지금 의 내동 일대에 조계지를 만드는 등 청일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확장 일로에 있었다. 또 일본과 청국 조계를 가르는 경계 계단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공자 석상을 지나 이내 ‘자유공원’에 닿는다. 응봉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공원 일대에는 서양 각국의 조계지가 있었다. 1905 년 기준으로 12,711명의 일본인과 2,274명의 중국인, 50여 명의 서양 인이 거주했지만, 조선인은 10,866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유입이 엄청났다.
일본과 청국 그리고 서양 각국은 그들의 문화도 함께 갖고 들어왔다. 1890년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에 일본 신화 속의 천조 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과 메이지 천황을 주신으로 하는 ‘일본신사’를 비롯해 각종 일본계 사찰들이 들어서면서 일본 종교의 한반도 유입이 본격화됐다. 문화 공연장들도 들어오면서 일본 조계지에 ‘인천좌’라는 상설공연장 이 세워진 것은 1897년, 지금의 사동에 ‘가부키좌’가 생긴 것은 1905년 의 일이다. 이어 1909년에는 지금의 신생동에 ‘표관’이 들어서면서 신 파 연극들이 공연됐다. 청국 문화의 흔적은 음식으로 대변된다. 대표적인 것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 짜장면이다. 제물포에 거주 하던 청국인들은 대부분 산동반도 출신으로 일자리를 찾아 건너온 가 난한 이들이었다. 짜장면이 등장한 것은 그즈음이다. 반찬도 필요 없 고 다른 면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천히 불어서 노동자들의 한 끼 식사 로 인기를 끌었다. 또 주로 청국인들이 채소를 갖다 팔아 ‘푸성귀전’이 라 불렸던 시장은 오늘날 신포시장의 기원이 됐다.
한편, 서양인들은 근대적인 의료와 교육시설을 갖고 들어왔다. 예컨대 내동에 성공회성당을 세운 뒤 성누가병원을 열어 의료사업을 펼친 이 는 영국성공회의 코프(한국명 고요한) 주교였다. 성공회 강화도성당이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지은 것처럼, 성누가병원 역시 실내를 온돌 방으로 만든 점이 돋보였다.
무역에서 수탈로 이어진 역사
많은 외국인들이 수도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제물포에 상사를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세창양행’이다. 이들은 당시 큰 인기를 끈 ‘세창 바늘’ 등의 생활잡화는 물론 각종 금속제품과 약품, 염료, 화약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한편 인천과 한성 마포를 오가는 여 객선을 운영했다. 나아가 광산 채굴권을 따내거나 조선 정부에 거액의 차관을 빌려주는 등 만만찮은 사업 규모를 자랑했다. 지금의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 당시 붉은 기와를 올린 인천 최초의 서양식 건물, 세창양행의 사택이 있었다. 다만 그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도서관으로 사용되다 해방 뒤 인천시립박물관 부속건물로 쓰였지만, 인천상륙작전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청국 상인들이, 러일전쟁 후에는 러시아인들이 배 척됐고,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이후에는 미국과 독일, 영 국 등 서양 각국의 무역회사들도 위축됐다. 그에 반해 점차 ‘대창’이나 ‘협동’ 등 일본 자본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1905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 이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거래의 형식 을 취하던 무역 관계도 노골적인 수탈 양상으로 변했다. 전쟁 직후 을 사조약 체결을 강제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강력한 권한을 지닌 통감을 두기로 한 상황이니 조선 전체가 자신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각국 공 원의 이름을 일본 신사가 있던 동공원에 대비해 서공원으로 바꾸는 지 명변경작업도 병행했다.
수탈의 현장 중 압권은 인천 축항(築港)이었다. 기존의 항만 시설은 조 선에서 수탈한 쌀과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가져가기에 턱없이 부실했 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데다 개펄이 넓어 대형 선박을 접안하기 힘든 탓이다. 일본이 1911년부터 7년 동안 제물포에 아시아 최초의 갑문식 항 구를 만들기로 했던 이유다. 누군가는 인천 축항이 조선에 근대를 가져 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조선인 노동력을 착취해 궁극적으로 효율적인 조선 수탈을 위한 사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백범 김구도 축항 건설에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제물포는 구슬픈 역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미국과 전쟁하던 일본은 1939년 제물포에서 멀지 않은 부평에 조병창 을 세우고 각종 무기와 보급품을 만들어 전쟁을 치렀는데, 노동자는 대 부분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무기 생산을 늦추고자 태업을 감행하고 무 기를 빼내 독립운동단체에 넘기기도 했다. 앞서 1935년에는 노동 환경 이 지극히 열악했던 부두 노동자 1천여 명이 총파업을 벌였고, 인천 내 19개 정미공장 노동자들도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 등의 조건을 내 걸고 총파업에 나섰다. 또 이들은 인천노동공제회와 인천노동총연맹, 인천소성노동회 등을 만들어 일제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향후 한국 노동운동의 기틀을 닦았다.
활력은 광복 뒤에도 이어졌다. 제물포 남쪽에 있는 인하대학교의 이름 은 인천의 ‘인(仁)’자와 미국 하와이주를 음차한 ‘하(荷)’자를 합한 것이 다.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이 대학의 건립자금을 댄 이들이 하와 이 교민들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부터 3년 동안 6·25 전쟁이 이어 지는 과정에서 머나먼 이국땅 하와이에 있던 교민들은 전쟁으로 폐허 가 된 조국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학교육이라는 데 뜻을 모으고 대 학교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자금은 15만 달러, 거기에 인천시가 시유지를 제공하면서 1954년 인하대의 전신인 인하공대가 들어섰다.
그런데 하와이 교민들은 왜 인천에 대학을 만들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 은 인천이 1902년 말 한반도 최초로 집단 이민을 떠나온 자신들의 고 향이었던 까닭이다. 내리교회의 미국인 조지 존스 목사의 알선을 통해 1902년부터 1905년까지 3년 동안 7,200여 명의 조선인이 제물포를 떠 나 하와이로 향했다. 문제는 언젠가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며 떠나온 조 국이 몇 해 뒤 일본에 강제병합됐다는 데 있었다. 이에 당시 하와이 교 민들은 항일비밀결사체를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 했는데, 6·25전쟁 뒤에는 폐허가 된 고국의 재건을 위해 무엇보다 중 요한 것이 대학건립이라며 직접 두 팔 걷고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제 물포는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연대와 노력이 속속들이 녹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레트로 관광 너머의 공간 제물포
개항과 함께 몰려든 일본인과 청국인, 또 다양한 서양인들과 6.25 전 쟁 때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 경제개발 시기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 를 찾아 몰려든 이들까지 제물포를 위시한 인천은 한국의 다른 어느 도 시보다도 다양한 인적 구성과 역사적 역동성을 보여왔다. 물론 이는 많 은 사람이 인천의 정체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도시는 한국과 세계를 잇는 관문이면서 개항 이래 줄곧 서울 을 바라봐 온 ‘해바라기’와 같은 성격도 지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998년 인하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실시한 인천시민의식조사에서 ‘사정 이 허락하면 인천을 떠나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45.1% 나 됐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의 사정은 많이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 다’는 게 인천 연구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이다. 그러나 학문 영역으로 서의 ‘인천학’을 창조하자거나 시민 차원의 ‘인천사랑운동’이 일고 있는 게 또한 지금의 제물포다. 그동안 헤쳐온 개항과 수탈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인천만의 재기를 위한 활력이 또 어떤 모습으로 펼 쳐질지 궁금해진다.
04_1901년 청국과 일본 조계지 사이에 클럽 목적으로 들어선 옛 제물포구락부 건물
05_옛 제물포구락부 내부
06_조선은행 인천지점
-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