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인간문화재 그 깊이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사진. 안호성(사진 작가)
장인의 소명을
담금질하다
유기장 보유자 김수영 선생 3대
선대의 우뚝한 족적을 따라가는 후대의 발걸음은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유기장 보유자로 인정된 김수영 선생도 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유기에 대한 얼과 혼을 유지하면서 물려받은 공방을 후대에 오롯이 다시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한층 성장하게 했고, 한국유기의 대 표 명장으로 명성을 잇게 하는 동력이 됐다. 지금도 김수영 선생은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소명으로 구슬땀을 흘린다.
UN의 월인천강지곡 인쇄동판을 만든 1대 김근수 선생
지난 1991년 9월 17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굵은 선 하나가 그어진 날이 다. 정부수립 43년 만에 유엔에 남북한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로부터 일주일 뒤 9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이 유엔을 방문해 연설했고, 유엔가 입 기념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인쇄동판과 인쇄본(영인본)을 유엔 사무처에 전달했다.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 간행된 최 초의 한글 활자본으로,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초기 국어와 인쇄 관련 연 구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처음에는 유엔 가입 기념물이 월인천강 지곡 인쇄동판과 인쇄본이 아니었으나,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노 대통령을 설득해 기념물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9월 유엔 본부를 방문하고, 그 해 다음 달 9일 한글날에 페이스북에 “유엔 총회에 갔을 때 유엔 본부에 전시된 활자 본 월인천강지곡을 보았다. 한글 창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금 속활자 인쇄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유엔 본부에 전시돼 있는 이 인쇄동판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 고(故) 김근수 선생이 안성 유기공방에서 제작했다. 유엔에 전시 된 것과 똑같은 인쇄동판이 전시된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김근수 선생 이 터를 닦고 유물을 모아놓은 ‘안성마춤 유기박물관’이다.
찬연한 유기와 함께 빛내온 삶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유기는 우리 인생의 통과의례를 지배해 왔다. 아 이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유기는 돌상에 놓여있는 식기다. 이 유기식 기는 곡기(穀氣)가 끊기는 영면(永眠)에 드는 순간까지 하루 3식, 3번을 대했다. 생과 사, 이 긴 ‘통과시간’을 유기제품을 곁에 놓고 같이했다. 조 상들은 선대의 제삿날과 추석과 설이면 유기를 꺼내와 닦으며 차례를 준 비했다. 유교의 제구뿐만 아니라 불교의 불기(佛器), 기독교의 성구(聖 具)도 유기제품이 많았다. 유기는 이렇듯 우리 삶 속에 찬연함을 뽐냈는 데, 그 찬연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안성마춤 유기박물관’이다. 안성마춤 유기공방의 유기박물관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 유자 고(故) 김근수 선생의 ‘역작(力作)’이고, 역작의 유기제품들이 전시 돼 있다. 1세대 유기장 보유자 김근수 선생의 혼과 그 혼으로 빚은 기예 의 걸작들의 ‘거처’다. 김근수 선생은 유기 제작을 넘어 이 박물관에 건립 과 운영에 더 애정을 쏟았고, 후손인 아들 김수영 선생과 손자들이 유기 제작의 대를 잇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저는 유기의 고향 안성에서 태어나 생활의 터를 닦고 지금까지 거주하 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인지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흔하게 보던 유 기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그 은은한 자태와 광택을 제 스스로 구현해보고자 기능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초년 시절에는 많은 실 수와 그에 따른 고뇌로 보냈지만, 어려움을 딛고 1946년 2월에 안성유기 공업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유기를 다루고 만들게 됐습니다. 전통적 유 기제작 방법과 더불어 새로운 기법을 연마하는 데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 울인 결과,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는 저의 아들 수영이 유기장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받았습니다.” 2009년 10월 안성마춤 유기박물관 개관과 함께 발간된 소장품 도록에 남겨진 김근수 선생의 ‘유언’ 같은 인 사말이다.
평생의 역작, 안성마춤 유기박물관으로 탄생하다
유기박물관에는 김근수 선생과 아들 김수영 선생이 직접 만든 유기제품 외에 김근수 선생이 젊을 때부터 50여 년간 모은,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유물들이 즐비하다.
우리 전통과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점차 소원해지고 가까이서 향유하기도 어려워지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남 루하고 흔한 것일지라도 많은 분과 함께 보고 느끼는 작은 기쁨을 누리 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근수 선생은 박물관 개관 7개월을 앞둔 2009년 3월 타계함으로써 박 물관은 그의 ‘유작(遺作)’이 됐다. 박물관을 안내하던 김근수 선생의 손자 이자 김수영 선생의 아들인 김범산 씨는 손자로서도 개관을 못 보고 작 고한 할아버지에 대해 아쉬움이 아직 크다. 할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 김수영 선생, 그리고 3대째 가업을 잇는 삼 형제들의 얼과 혼이 깃들었으 니 그러할 만도 했다.
아버지 김근수 선생의 대를 이어 유기장이 된 아들 김수영 선생도 생활 터전이 ‘유기 터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흔하고 가깝게 본 게 유기(제 작)였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유기 제작법을 차차 배우기 시작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한 뒤 직업적 소명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유 기장 보유자가 됐다.
현재 공방에는 그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포함한 15명의 직원이 일하 고 있다. 공방은 한국유기의 대표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나 몇 차례 고비들이 있었고, 여건은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1950~60년대 일본 과 미국에서 식기와 장식용으로 한국의 유기를 찾아 수출길이 열렸고, 1980~90년대 초 유기에 대한 향수와 유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면서 국 내에서도 많이 찾았으나, 날로 변화하는 음식문화와 생활환경은 김수영 선생에게 또 다른 도전이자 과제가 되고 있다.
유기장 3대의 소명을 넘어
2014년, 안성 공단에 있던 공방에 화재가 발생하여 또 다른 어려움을 겪 기도 했다. 공장이 불에 타면서 유기제작에 필요한 도구와 소품들도 타 버렸다. 말 그대로 화마(火魔)였다. 다른 사업이라면 문을 닫으면 되지 만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의 소명을 닫을 수는 없었다. 다시 일군다는 의지로 아들 삼 형제와 함께 공방을 다 른 곳에 옮겨 ‘안성마춤 유기’의 맥과 선친의 뜻을 잇고 있다. 그는 아직도 기물 올리기부터 가질 공정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에 참여해 장인의 혼과 기예를 불어넣는다. 아버지가 그렇듯 김수영 선생도 식기류의 유기만 만 든 게 아니라, 촛대나 종 등 장식품도 직접 손으로 빚는다.
“금이 뜨거운 불을 따라 유구한 시간을 흐른다. 흐르고 흘러 마침내 형태 가 되고 그 빛깔은 빛나고 빛나 영화롭게 빛난다.”
‘淸耕(청경) 金壽榮(김수영)’. 김수영 선생은 자신이 만든 유기 작품에 ‘청 경(淸耕)’이란 호를 낙관으로 찍을 때마다 이 시를 마음에 새긴다. 이는 선생의 삶의 태도이자 작품 세계이고, 선친을 그리고 유기를 다루는 선 생의 마음과 태도의 표현일 테니.
고희를 넘겨서도 여전히 공방 현장에서 유기를 제작하지만, 김수영 선생 의 마음 한 편은 든든하다. 두 아들이 이수자로 대를 잇고 있고, 막내아들 은 아버지와 형들이 제작한 유기를 널리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다. 장남 김범진 이수자는 소명을 담금질하며 유기 제작에 몰입함으로써 자 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선대와 자기 삶의 의미를 되새겨가며 전통공예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차남 김범용 이수자는 아버지와 형님의 일을 공방 에서 도와주면서도 ‘미래의 유기, 미래의 공예’를 앞당겨 그리고 있다. 그는 유기 용도를 넓히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몇 해 전 한국문화재재단 이 주관하여 진행했던 ‘생활의 발견 - 식문화를 위한 제안’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해 유기의 활용성을 넓히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시리얼 몰 세트, 스푼 유기 워머, 유기 촛대 등이다. 김수영 선생은 아들 들의 작업 활동을 보면서 “다른 기능보유자보다 전승 여건이 나은 편이 지만 사회경제적 환경들이 손자 세대들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좋아질지 는 모르겠다”면서 “대를 잇는 작업을 장인의 소명으로 알고 지내왔다” 고 말했다. 오랜 소명을 향한 그의 묵묵한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지길 바라본다.
01_ 유기를 만들기 위해 쇳물 작업을 하고 있는 김수영 보유자
02_ 안성마춤 유기박물관에 전시된 유기용구
03_ 유기제작과정 재현모습
04_ 디자이너와 함께 만든 유기그릇
05_ 유기제품을 손질하고 있는 김수영 보유자
06_ 유기를 만들 때 쓰는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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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민영(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 전문위원)
사진. 안호성(사진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