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만나기

「문화유산」이란 우리 역사와 전통의 산물로서 문화의 고유성, 겨레의 정체성 및 국민생활의 변화를 나타내는 유형의 문화적 유산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궁궐, 고분, 성곽, 한옥, 사찰 등의 문화유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안내드립니다. 자세히보기
궁궐 만나기



  서울에는 조선의 궁궐이 모두 5곳(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남아있습니다. 조선의 궁궐이 여럿 있는 이유는 중심궁궐 외에도 필요할 때 왕이 옮겨갈 궁궐을 추가로 지었던 내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왕이 머무는 곳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궁궐이란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하는 곳이니 지금으로 치면 정부청사와 대통령실이 같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담아 궁궐을 건축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선이 건국한 뒤 처음 지은 궁궐은 경복궁(1395)입니다.
경복궁은 6조 거리(지금의 광화문광장)와 백악(북악산) 사이에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한양 안에서 위치로 보거나 궁궐 내부의 구조, 건물의 규모 등을 볼 때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입니다.

  이후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머물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궁궐이 창덕궁입니다.
그리고 조선 9대 왕인 성종 때 왕실의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만든 곳에서 시작한 창경궁 등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궁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으로 조선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탔습니다.
임진왜란 때, 피란을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머물던 곳인 정릉동 행궁은 나중에 경운궁(덕수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다만,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복구했고 경덕궁(경희궁)이 새롭게 지었으나 경복궁은 복구하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 내내 비어 있던 경복궁 터에 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1860년대에 다시 궁궐을 지으면서 다시 경복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면서 새롭게 거처로 삼은 곳이 경운궁으로 지금의 덕수궁입니다.
덕수궁은 근대의 변화를 받아들여 서양식 건축물을 지었으며 황제가 머무는 궁궐로서 모습을 갖추고자 했습니다. 

 서로 달라 보이는 조선의 궁궐이지만 모두 경복궁을 참고하였습니다. 궁궐마다 지형에 따라, 역사에 따라 모습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궁궐의 조영에는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궁궐은 신하들이 머무는 공간인 외조, 임금이 머무는 공간인 연조, 그리고 신하와 임금이 만나 정치를 논하는 치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궁궐 정문의 이름에는 백성을 교화한다는 ‘화(化)’가 들어가 있는 것도 그러한 사례입니다. 물론 각각의 궁궐은 나름의 특징도 있습니다.
경복궁이 엄정한 규범에 따라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건물을 배치했다면 창덕궁은 자연의 지형을 활용해 자유로운 배치를 보여주며 후원도 크게 지어 휴식 공간을 넓힌 점이 특징입니다.

  또 창경궁은 왕실 가족을 위한 공간이 넓고 신하들이 업무를 볼 공간이 좁습니다. 그리고 한때 창덕궁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던 궁궐인 경희궁은 근대에 들어와 많이 훼손되면서
지금은 숭정전을 비롯한 중심공간 일부만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역사와 함께 새롭게 변한 근대 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울의 궁궐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공간이며, 또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 그리고 궁궐마다 다른 사연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또 서울의 자연, 그리고 궁궐 내 후원에서 한국의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종묘, 사직 만나기


 
  종묘와 사직단은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왕에게 ‘종묘와 사직의 보존’, 또는 ‘종사의 보존’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종묘와 사직은 국가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종묘와 사직단 가운데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廟)이고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라는 점에서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며 각각 시간과 공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종묘는 조선의 도읍지인 한양에만 있다면 사직단은 지방에도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 국가의 도읍지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기도 합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도읍지를 구성할 때 갖추어야 할 것이 여럿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좌묘우사(左廟右社)란 원칙입니다.
곧, 도읍지 왼쪽에 종묘를 짓고 오른쪽에 사직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좌와 우는 왕이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이에 따라 좌는 동쪽, 우는 서쪽을 가리킵니다. 

  종묘에는 제사 준비를 하거나 왕이 머무는 것과 같은 부속 건물을 제외하고 중심에 두 개의 커다란 건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전이며 다른 하나는 영녕전인데요, 정전이 좁은 의미의 종묘입니다.
정전은 좌우로 긴 건물로 모두 19개의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방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니 모두 19명의 왕과 왕비가 함께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영녕전은 16개의 방이 있는데 역시 각각의 방에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물 구조는 유교의 제례와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황제는 7대의 조상, 왕은 5대의 조상, 그리고 대부는 4대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므로 종묘는 황제의 나라라면 7실, 제후의 나라라면 5실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7대, 혹은 5대를 넘어가는 조상의 신주는 땅에 묻습니다.
(다만,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땅에 묻는 것이 미안하다고 해서 영녕전을 지었습니다.)

  조선도 처음에는 7실을 갖춘 종묘를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훌륭한 왕은 제사 대수의 기준과 상관없이 계속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조항이 변수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주를 불천위라고 하는데요, 불천위가 계속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종묘 정전 건물은 부득이 여러 번 증축했습니다.

  그래서 명종(11대 왕) 때 11칸, 영조(21대 왕) 때 15칸, 그리고 헌종(24대 왕) 때 19칸으로 늘려 지었습니다. 이에 따라 종묘 정전은 태조의 신주를 모신 서쪽을 기준으로 삼고 시간이 지나며 동쪽으로 조금씩 늘어난 것인데요,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곧 조선왕조가 길게 이어지며 종묘 정전의 길이도 늘어난 것이니 그 건물의 길이가 조선 역사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종묘 정전 건물은 길이가 약 100미터 정도이고 조선이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니 정전 건물 1미터가 5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묘 답사를 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종묘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 그러니까 왕과 왕비의 영혼이 됩니다.그러므로 종묘는 모든 공간이 신을 위주로 구성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종묘에 길게 이어진 두 갈래 길 가운데 높은 길은 신, 낮은 길은 왕을 포함한 제관을 위한 것이어서 높은 길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 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 역시 왕이 아닌 신을 위해 만들어 놓았으니 종묘를 찾은 관람객은 옆으로 난 문을 통해 입장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종묘와 사직단에서는 조선시대 제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사직단에서는 봄과 가을, 종묘에서는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이뤄지고 있는데요, 문화유산으로서 종묘, 사직단과 함께 무형유산으로서 사직대제와 종묘대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조선왕릉 만나기


 
  한국의 국가유산인 조선왕릉 40기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서울과 경기도에 흩어져 있으며 드물게 강원도 영월에 단종의 장릉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이 죽으면 세 개의 임시관청이 생겨났습니다. 왕의 시신을 돌보는 <빈전도감>, 그리고 왕의 장례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국장도감>, 그리고 왕의 무덤인 왕릉을 만드는 <산릉도감>입니다.
왕이 죽은 뒤 약 5개월 뒤에 국장을 치렀으니, 산릉도감은 그 기간 안에 왕릉을 조성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관리와 풍수가가 참여하는 간심단을 보내 먼저 왕릉이 들어설 곳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왕릉 자리를 확정하면 왕릉 영역을 정하면서 민간의 가옥이전이나 무덤의 이장을 위한 보상 문제를 정리하고 왕릉 건설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선왕릉을 구성하는 요소가 건축과 토목과 관련된 영역이라는 점에서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석재를 다루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능침 앞에 있는 혼유석은 무게가 10톤 안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능침을 둘러싸는 병풍석, 그리고 난간, 문석인, 무석인 등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왕의 관인 재궁이 들어가는 곳은 조선 초기의 왕릉은 석실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릉 근처에 채석장을 설치하고 돌을 채취하고 돌을 다듬어 필요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재실과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등 여러 건축물도 지어야 했기 때문에 5개월 안에 왕릉 조성 공사를 끝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모습을 갖춘 조선왕릉은 재실을 중심으로 하는 진입 공간, 홍살문과 정자각 영역의 제례가 이뤄지는 제향 공간, 그리고 왕의 무덤이 있는 능침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릉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습니다.

  처음 왕의 업적을 큰 비석에 새긴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으나 문종(제5대 왕) 때 이후 신도비 제작에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해서 만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왕릉의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자 조선 후기에 왕릉의 이름을 적은 표석이 등장하였습니다.또 조선 초기에는 관(재궁)이 들어가는 공간을 석실로 만들었으나
세조(제6대 왕) 이후 석회를 부어서 관이 들어가는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조선왕릉은 대체로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왕릉을 옮기게 되었을 때, 각각의 석실에 들어가 있던 왕과 왕비를 합장해서 모시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왕과 왕비를 합장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같은 영역의 다른 언덕에 왕릉을 만드는 방식인 ‘동원이강릉’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생존 당시에는 왕이 아니었으나 나중에 추존이라는 방식을 통해 왕이나 왕비가 되는 경우 새롭게 만들 왕릉은 원래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조선왕릉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고종 때입니다. 고종은 중국 황제릉을 참고하여 명성황후의 왕릉을 만들고자 했는데요,
이러한 바람이 이루어져 고종이 승하한 뒤 지금의 홍릉이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은 왕릉을 만들 때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필요할 경우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유산이며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의 통일적이면서도 다양한 면모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분 만나기



  고분은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고대국가의 무덤을 가리킵니다. 고분의 고고학적 연구는 문헌이 부족한 이 시기의 연구에 자료를 제공합니다.
고분은 한 나라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계속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분군’, 곧 고분이 여럿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고분군 각각의 고분에서 정보를 모은다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국가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고분, 혹은 고분군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은 삼국시대와 가야의 고분군입니다. 고분군은 나라에 따라서 다르며, 같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시기에 따라서, 또 지역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고구려 고분군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옛 고구려 도읍지 국내성 인근의 중국 집안(지안) 일대와 평양성이었던 평양과 인근의 평안도에 고분군이 있습니다.
평안도의 강서대묘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사신도’ 벽화로 유명합니다. 백제는 첫 도읍지인 한성, 지금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 두번째 도읍지였던 웅진, 지금의 공주의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
그리고 마지막 도읍지로 사비로 불렀던 부여의 부여왕릉원이 유명합니다. 또 무왕(제30대 왕)시기 별도였던 익산의 쌍릉 역시 고분으로 평가받습니다. 

  신라는 도읍지였던 서라벌, 지금의 경주 곳곳에 고분이 있는데요,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대릉원과 노동동, 노서동의 고분군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천마총을 비롯해 금관총, 금령총 등은 화려하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을 비롯해 경주 일대에 있는 왕릉으로 전해지는 여러 고분은 신라 역사를 밝힐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가야의 고분군 7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김해와 고령을 비롯해 창녕, 함안, 합천, 고성, 남원 등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전라북도에 이르는 가야의 고분군은
문헌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가야의 역사를 복원할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마한의 유적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일대의 반남고분군은 한국 고대사의 풍부함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이처럼 고분군은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시기에는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문헌 기록과 함께 당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임머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성곽 만나기



  성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놓은 군사 시설입니다. 한국은 외침이 많았던 역사의 영향으로 곳곳에 많은 성곽을 만들었는데요, 산이 많은 자연지형 덕분에 많은 산성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곽은 여러 기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성곽을 쌓는 재료에 따라서 흙으로 쌓은 토성, 돌로 쌓은 석성, 벽돌로 쌓은 전축성 등이 있습니다.
한국은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환경 덕분에 석성이 많으며, 수원의 화성이나 강화도의 진과 보, 돈대와 같은 군사 시설에는 효율성을 위해 벽돌을 돌과 함께 섞어서 썼습니다.
흙으로 쌓은 토성은 방어를 위해 성벽 외에도 성곽 주변에 만든 연못인 해자나 성벽 위에 세우는 목책을 써서 보완하기도 했습니다. 

  성곽의 구분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분류는 성곽을 쌓은 목적에 따라 구분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곽은 이러한 구분법에 따라 문화유산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도읍지를 둘러싼 성을 도성이라고 부릅니다. 한양도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도성 밖에 다시 한 번 길게 성을 쌓기도 하는데 이를 나성이라고 부릅니다.
고려의 도읍지에 쌓은 개경의 나성, 그리고 백제의 도읍지였던 부여에 쌓은 부여나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중심고을이며 경제, 군사, 행정의 중심지에 쌓은 성을 읍성이라고 합니다. 읍은 마을을 뜻하는 말인데요, 전라북도의 고창읍성, 전라남도의 낙안읍성, 충청남도의 해미읍성이 유명한 편입니다.
또 정조 때 경기도 수원에 쌓은 화성도 읍성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동아시아와 한국 성곽의 전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을 높게 평가하여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사시에 피난이나 방어를 위해 산에 쌓은 성은 산성이라고 하며, 그 수도 많고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산성 가운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경기도의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또 군사적 요충지에 쌓은 성은 진이나 보라고 부릅니다. 인천의 강화도에 가면 광성보나 갑곶돈대가 이러한 예에 해당합니다. 요새와 요새를 이어 국경 근처에 길게 쌓은 성은 장성이라고 하는데,
고구려와 고려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곽에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적의 공격에 취약한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둥글게 성문 밖에 쌓은 옹성, 길게 이어진 성벽 중간을 돌출시켜 공격과 방어에 유리하도록 만든 치성, 치성 위에 지붕을 씌운 포루, 총과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인 포루,
다른 지역에 소식을 전하기 위한 불이나 연기를 피우는 봉돈 등이 그러한 시설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성곽을 살펴볼 때는 성곽을 만든 목적, 성곽에 있는 시설 등을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또 성곽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에 만들었기 때문에 경치가 좋은 곳이 많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다면 성벽 위로 올라가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주변의 풍광을 즐기는 것도 좋은 답사 방법입니다.

한옥 만나기



  한옥은 한국의 전통 가옥, 곧 한국의 전통적인 살림집을 말합니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크게 궁궐이나 사찰 건축과 같은 거창함과 장엄함을 강조하는 건축이 있고,
이러한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생활하던 살림집인 한옥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한옥은 지붕의 재료에 따라 초가집이나 너와집, 기와집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서도 한옥의 모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지금은 한옥이라고 하면 대체로 조선 후기에 완성된 집을 기준으로 하며 대체로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많습니다. 

  한옥은 겉으로 보기에도 다른 나라 집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곡선을 강조하는 처마의 선이나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 한국의 산이나 들에서 나는 재료를 활용한 것 등을 통해 겉모습으로도 한옥의 특징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의 집과 구분되는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구조에 있습니다. 바로 온돌과 마루를 함께 갖춘 집이라는 점입니다.
난방을 위한 온돌, 시원하면서도 넓은 공간인 마루를 함께 볼 수 있는 구조는 전세계적으로 한옥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한옥의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뜨거운 공기가 고래를 통해 방바닥을 이루는 구들을 데운 뒤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갖췄습니다. 단순하게 방바닥을 데우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한옥에서 마당을 주의해서 보면 좋습니다. 온돌을 채택한 한옥은 넓은 건축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필요할 경우 대청마루를 통해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마당까지 활용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라면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공간이지만 한옥의 마당은 비워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한옥의 마당에서 그 집의 어떠한 행사가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한옥의 이해를 위한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입니다.

  한옥은 조선시대의 유교의 영향을 받아 공간 구성이 이뤄졌습니다. 양반이 생활했던 한옥에는 그러한 특징이 조금 더 뚜렷한 편입니다.
남성들의 공간인 사랑채,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를 구분하는 남녀유별의 사상,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인 가묘를 집 안에 만든 조상숭배의 사상,
그리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행랑채를 통해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옥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근대 도시에 등장한 한옥은 이전과 달리 가족 중심의 생활을 위해 조그마한 규모로 지었습니다. 또 새로운 재료인 유리나 타일을 이용해 지었으니 서울의 북촌이나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한옥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옥을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상북도 안동의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이 유명합니다. 한국의 한옥은 구경을 통해서도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으나 고택에서 하루나 이틀 묵어본다면
그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될 것입니다. 얇은 한지로 만든 문 하나를 통해 자연과 구분되는 공간의 특징, 온돌의 온기와 마루의 시원함은 다른 나라의 집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한옥이 주는 경험입니다.

사찰 만나기


[사진 - 보은군 문화관광]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는 당대에 정치와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1천 년이 넘는 시간 한국 역사와 함께해 온 불교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찰, 곧 절입니다. 절은 일정한 원칙에 따라 건물을 배치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복잡한 내용이 필요하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기준으로 본다면 크게 두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절의 건물 배치를 가람배치라고 하는데요, 먼저 삼국시대에 있었던 간단한 가람배치입니다. 이 시기 가람배치는 탑과 불상을 모신 건물인 금당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대체로 고구려와 신라는 탑 하나에 금당을 세 개 짓는 가람배치(1탑 3금당)였다면 백제는 탑과 금당을 하나씩 짓는 가람배치(1탑 1금당)를 채택했습니다.
이러한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신라의 절의 유적이 경주의 황룡사지입니다. 또 백제 절의 유적으로는 부여의 정림사지가 있습니다.
백제의 거대한 사찰 유적인 익산의 미륵사지는 지금 탑이 세 개, 금당이 세 개 있는데 1탑 1금당의 절을 세 개 붙여서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 이후 절의 모습은 복잡해졌는데요, 이 가운데 도시에 있던 절은 그 사례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신 산에 있었던 절은 그 모습을 대체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도 이 범주에 해당합니다. 이들 산사의 가람배치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먼저 세 개의 문을 지나면 부처님이 계신 법당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부속 영역과 스님들의 생활하는 공간이 나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 개의 문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이 일반적입니다. 일주문은 산문으로도 부르는데요, 절의 입구에 해당합니다. ‘일주’란 이름은 옆에서 보았을 때 기둥이 하나로 보인다는 의미인데요,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문에 절이 자리를 잡은 산의 이름, 그리고 절의 이름이 적혀있는 현판이 있습니다. 천왕문은 불법(불교)을 수호하는 네 방향을 지키는 신이 있는 문입니다.
이들 신은 각각 동방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라고 하는데요, 악귀를 밟고 있는 형태의 조각으로 만든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불이문은 진리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상징하는 문인데요, 손에 무기를 든 존재인 금강역사 조각이 있는 금강문으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절의 중심 영역, 곧 부처님의 영역은 탑과 법당(삼국시대 금당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으로 이뤄져 있는데요, 각각의 절의 기대고 있는 불교 경전에 따라 모셔지는 부처님이 달라집니다.
보통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있는데요, 아미타불을 모시는 경우 극락전이나 아미타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경우 대적광전 등의 이름을 가진 법당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드물게는 부처님이 아닌 보살을 모시기도 하니 양양 낙산사가 대표적입니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라는 법당을 절의 중심에 마련했습니다. 
절의 중심 영역 밖에는 지옥을 상징하는 명부전(시왕전),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나한전, 역대 승려의 초상화나 조각을 모신 조사당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또 예불을 드릴 때 필요한 법구인 불전사물, 곧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을 보관하고 연주하는 범종각(혹은 법고각)이 있습니다. 

  또 칠성각이나 독성각, 산신각과 같은 건물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절 입구나 주변에 역대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승탑이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요사채는 관람객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을 구경하는 것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으나 절에서 운영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또 절의 음식은 고기를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맛있는 음식(공양이라고 합니다)이 많다는 점에서 절에서의 식사도 추천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절은 각각의 건물이  조화로운 배치를 통해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절 밖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어서 한국의 자연과 어우러지는 절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서원 만나기



  서원은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처음에 서원이란 이름은 중국 당나라, 혹은 송나라 때 학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송나라의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 곧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이 유명했습니다.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시대 유학자는 이러한 주자의 모습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원의 운영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중종(제11대 왕) 때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은 처음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고향인 풍기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을 기리고 후학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이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나라에 백운동서원의 새로운 이름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조선의 왕인 명종은 토지와 노비, 책을 내리면서 동시에 ‘소수서원’이란 새 이름이 적힌 편액을 함께 내렸습니다.
이렇게 편액을 내려 국가에서 인정한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합니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소수서원의 사례를 참고하였고 나라에서도 호응하며 많은 사액서원이 나타났습니다.

  성리학은 선비들이 선현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서원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선현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서원마다 각각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자를 기리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소수서원은 안향과 주세붕, 도산서원은 이황, 자운서원은 이이, 옥산서원은 이언적,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기리는 것이 그 예입니다.
서원은 공부하기 좋은 곳을 찾아서 짓는데요, 경치가 좋은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서원 구경은 한국의 좋은 경치를 찾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서원은 대체로 비슷한 건물의 배치를 보여줍니다. 곧, 앞에는 강당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뒤에는 선현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으며
부속 건물로 목판과 책을 보관하는 장판각,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전사청,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머무는 고직사 등이 있습니다. 또 서원에 들어가는 문은 높은 누각을 지어 시 모임과 같은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서원 가운데 9곳(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서원은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며 서원의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원림 만나기



 
  한국에서는 옛 정원을 원림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정원(庭園)이란 말 그대로 집이나 건물 마당에 꾸민 공간입니다. 정원을 꾸미는 요소는 나라에 따라 다르나
꽃이나 나무가 기본이 되고 돌이나 자갈, 혹은 모래, 그리고 물을 더해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듭니다. 자연의 여러 요소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꾸민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원을 바라보는 철학적 요소는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보통은 단조로운 일상의 공간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꾸미고 집 앞, 혹은 건물 앞에 두고자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연과 한옥의 쓰임과 관련해 이러한 정원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제약사항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후는 정원 조성에 불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반도 중부 지방은 꽃과 나무가 없는, 겨울과 이어지는 시기가 몇 개월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풀과 나무를 심는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대신 한국의 자연은 아기자기한 산과 강, 언덕과 개울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짓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한국에 유명한 정원이 많지 않으나 정자가 많은 이유입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자연 그 자체를 완성된 것으로 보아 자연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유교 성리학의 기본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서는 ‘격물치지’라고 하여, 자연의 이치를 살펴 세상의 원리,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인공적인 변화를 주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한옥의 경우 마당에서 여러 행사를 해야 했다는 점에서 꽃과 나무를 심어서 정원을 꾸미는 것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되, 최소한의 인공적 요소를 더해서 만든 ‘원림(園林)’이 많았습니다. 원림은 일상의 복잡함에서 물러나 머물며 생활하는 곳이라서
이를 별서, 혹은 별서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림 가운데 대표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창덕궁의 후원입니다. 창덕궁 후원에는 조선시대에는 100여 개의 정자가 있었으며,
지금도 40여 개의 정자가 있으니 한국 원림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 민간의 원림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이 유명합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자연과 잘 어울리는 곳에 건물을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절이나 서원, 궁궐에서 원림의 요소를 갖춘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국가유산의 영역에서는 원림을 이루는 공간을 사적으로 지정하기도 하며, 자연유산에서는 주변 자연과 함께 명승으로 지정하여 보호합니다.

기록유산 만나기



  한국은 기록유산이 많은 나라입니다. 많은 전쟁 때문에 기록유산이 소실되기도 했으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통 덕분에 많은 기록물을 생산해냈습니다.
기록유산은 전통적인 것으로 책과 같은 문자로 기록된 것과 이미지나 기호, 금석문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시청각 자료와 인터넷 자료도 기록유산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록유산 가운데 모두 18건(2024년 기준)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 <동의보감>, <일성록>, <5.18민주화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새마을운동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조선통신사기록물>, <4.19혁명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기록유산을 통해 한국 문화의 독특함과 탁월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으로서 <훈민정음>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쓰임 방법을 정리한 기록유산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조선왕조 의궤>를 통해 조선의 역사와 궁중 문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림과 글을 이용해 정리한 의궤는 옛 모습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입니다. 



더불어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은 고려시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인 동학농민혁명, 국채보상운동, 4.19혁명, 새마을운동, 남북분단과 이산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이들 세계기록유산을 통해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선사유적 만나기



  선사유적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입니다. 선사시대란 문자로 된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시대 이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유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시 만들었던 도구의 재료를 기준으로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 순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세계적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 이미 문자 기록을 남기기도 해서 일률적으로 선사시대로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유적이 대표적입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을 통해 먹을 것을 구했으며 이동 생활을 해야 해서 별다른 집도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석기를 통해 그 변화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구석기시대 유적보다 훨씬 많은데요, 대표적인 곳으로 서울의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 미사동 유적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제주도의 고산리 유적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토기 제작의 흔적을 비롯해 농경의 시작,
그리고 움집의 등장과 같은 이전 시기와 크게 달라진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훨씬 규모가 있는 유적을 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유물로 고인돌이 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전라남도 화순, 전라북도 고창, 인천 강화도 일대의 고인돌군 유적 외에도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수만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세계에서 고인돌 집적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아우르는 유적으로 암벽화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 염원이나 상징을 볼 수 있는 암벽화 가운데 유명한 것은 울산의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대체로 이른 시기에 제작된 이 암각화는 고래사냥을 비롯해
육지에서 맹수를 사냥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울산 울주와 경상북도 고령의 암각화는 동심원과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볼 수 있어 반구대의 암각화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해양유산 만나기



  해양유산은 바다 속에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해양유산은 수중고고학의 연구와 발굴 과정을 통해 수습한 유물을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보존, 전시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해양유산이 바다 속에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양유산은 대체로 난파선에서 발견되는 문화유산인데요, 과거 어느 시기에 난파한 배와 그 배에 실린 물건을 통해 해당 시기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양유산과 관련된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3백만 척의 난파선이 바다 속에 있으며 이 가운데 1천여 척의 난파선만 조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해양유산으로 대표적인 것은 1976년 조사한 신안선입니다. 원나라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난파한 것으로 보이는 신안선에서는 유물 2만 7천여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제주도 앞바다, 완도 앞바다 등 여러 곳에서 난파선을 발굴하였는데요, 특히 고군산군도의 비안도와 십이동파도 바다에서 고려청자 운반선 1척에서 청자 1만 6천 점을 발견했습니다.
신안선 발굴 이후 현재까지 대체로 22개 유적에서 16척의 난파선, 11만 점의 유물을 찾아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해남부, 서해중부, 남해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수중고고학을 통해 해양유산 조사 및 발굴하고 있는데요, 보호와 조사를 위해 바다의 일부 해역을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전라남도 신안 해저유물 매장해역, 충청남도 보령 죽도 해저유물 매장해역, 전라남도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 매장해역이 이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