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떠날 길이 하영 남았다
나는 직업 여행가로 살고 있다. 좋건 나쁘건, 늘 떠나 있거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삶이다. 내게 일상은 언제나 이 둘 중 하나다. 다행히 아직은 젊고 팔팔하니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세월이 흘러 그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걱정하고 살았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겠지.
여하간 올해도 세계 방방곡곡 떠돌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을까? 오랜만에 내방 방바닥에 누워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하고 있었는데, 돌연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를 연재하게 됐다.
뭐, 고작 열 개면 쉬엄쉬엄 다니면 되겠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길 하나에 다녀와야 할 장소가 대여섯 개씩 있다. 그것도 전국 금수강산 곳곳에 퍼져서. 천천히 정리해야지, 하고 구석에 박아뒀던 배낭이 그대로 있길 다행이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열 개의 길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여행지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그러고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반복된 질문은 일종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라,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내가 평소에 보고 사는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첫 번째로 생각해요.”
여행이 많아지다 보니 떠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 때문에 내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떠나서 실제로 ‘떠났다’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일탈’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런 내게, 제주도야말로 긴 여행의 포문을 열기에 제격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제주도에 가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수십 번을 다녔는데도 그렇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이 여전히 ‘떠나왔다’고 느끼게 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배낭을 메고 공항을 나서자마자 제주의 세찬 바람이 나를 반겼다. 하늘은 프러시안블루로 맑게 개었다. 자연스레 방구석에서 재충전을 꿈꾸던 마음이 쓰윽 열렸다.
이런 산뜻한 시작이라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제주 말로 하영(많이) 남았지만, 무엇이 나를 막으리.
세상엔 설레는 출발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다. 나는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찾는다는 으뜸 명소, 성산 일출봉을 찾았다.
로마에 간 사람이 콜로세움을 찾고 파리에 간 사람은 에펠탑을 찾듯이 제주도 하면 ‘성산 일출봉’, 하고 어려서부터 익히 보고 들었다. 심지어는 ‘성산 일출봉에 오르지 않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말하지 말라’ 하는 사람도 봤다.
나는 이 정도 유명한 곳엔 반기를 들고 싶을 때가 있다. ‘흥, 나는 그런 여행자의 의무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관심한 척하고 싶어진달까. 확실히 어른스러운 짓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런 나도 성산 일출봉은 여러 번 올랐다. 처음은 언젠가 수학여행 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며 터덜터덜 올랐고, 그 후론 운동하는 셈 치고 자발적으로 올랐다. 그러면서 늘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으뜸 명소가 아니야. 멋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지고 싶지는 않아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하려면 최소한 백록담은 올라 봐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아마 백록담은 오르기 쉽지 않은 터라 성산 일출봉이 ‘제주도의 상징적인 명소’ 타이틀을 대신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면서 눈에 띄는 건 계단 옆에 우뚝 솟아있는 ‘등경돌’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돌은 어느 할머니가 바느질하는데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 한다. ‘아니 무슨 이렇게 거대한 돌 위에 등잔을 올려놓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바느질하던 할머니의 키가 워낙 컸다.
전설 속 이 할머니의 이름은 ‘설문대할망’. 키가 어느 정도로 컸냐 하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워 다리를 뻗으면 발끝이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걸쳤다고 한다. 지도에서 이 거리를 재어보면 대략 40킬로미터쯤 된다. ‘설문대할망’이 매일 등경돌에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 것은 옷이 한 벌 뿐이라 그렇다는데, 한 벌이라도 맞는 옷이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게 무척이나 상쾌했다. 한눈에 담기는 광활한 풍경에 나 역시 거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제주도를 여행할 때 이 ‘설문대할망’ 설화를 따라가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애초에 푸른 바다 한가운데 제주도를 만든 장본인이 ‘설문대할망’이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부터 치마에 흙을 퍼 담아와 섬을 쌓았다. 아무리 깊은 바다도 무릎 위를 넘기지 않았다고 하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섬 가운데 남은 흙을 모두 털어 넣어 한라산을 만들었다. 다만 이게 너무 높고 뾰족하다 보니 앉기 불편해서 봉우리를 꺾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푹 파여 있는 백록담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설문대할망’이 멀리 던져버린 봉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봉우리를 찾기 위해 정상에서 내려와 남서쪽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제주에는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산이 세 개 있다. 하나는 중심의 한라산, 하나는 동쪽 끝의 성산일출봉.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한라산 봉우리를 뚝 떼어다가 던져버려 만들어졌다는 서남단의 명산, 산방산이다.
서귀포 시내를 지나 서쪽으로 향할수록 산방산이 멀리서부터 웅장함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평탄한 지형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
산방산이 한라산의 꼭대기라는 전설이 생겨난 이유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백록담의 지름과 산방산 밑 둘레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한라산 정상의 돌 재질이 산방산과 마찬가지로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더욱이 산방산 생김새가 분화구 없는 종 모양으로 생겼다 보니 한라산의 비어있는 머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산방산 매표소로 입장해 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산방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 방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산책로의 끝에 있는 해식동굴 산방굴을 말한다. 이 안쪽에는 불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산방굴사라고 하였다.
산책로로 갈 수 있는 건 이 산방굴사까지다. 산방산 암벽에는 학술 가치가 높은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산방산의 문화유산적 가치 보존과 천연기념물인 암벽 식물지대 보호를 위해 이외의 지역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용머리 해안의 근사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물결치듯 유려하게 굽어있는 모습이 왜 용머리해안인지 굳이 의문을 품지 않게 한다. 산방산 자락에서 바다로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기세의 용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해발 150m 부근의 산방굴사에 도착했다.
가장 윗단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어 정면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굴은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굴 내부 천장의 암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고요한 동굴 안을 깨운다. 그 소리가 어째 영험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역시나 산방덕의 눈물이란 전설을 품고 있다.
산방덕은 하늘나라 선녀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고성목이라는 나무꾼과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전설엔 해피엔딩보다는 구슬프거나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고을의 사또가 그녀의 미모에 빠져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또는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강제로 둘을 이별하게 만든다. 이에 분노한 선녀는 산방굴사로 들어와 며칠을 목 놓아 울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산방덕의 눈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토록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산방굴사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마침, 이른 아침 시간이라 아무도 없이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엔 절벽으로 둘러싸인 송악산도 보였다. 그 뒤엔 평평한 가오리를 닮은 가파도가 있었고, 그 뒤엔 대한민국 최남단 섬인 마라도가 보였다.
그리고 사실 마라도는 내 다음 여정이기도 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모습에 미리부터 반가웠는데, 산방산을 내려와 해안으로 가보니 파도가 몹시도 성나 있었다. 배에서 꽤 고생하겠구나, 했는데 조금이라도 고생할 일은 없었다. 그날의 모든 출항이 결항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로 실망한다거나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조금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당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긴 시간 여행하며 얻은 것 중 하나는, 예상 못한 상황에 대한 맷집이다. 나한테 여행은 늘 우연함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이 불수록, 파도가 거셀수록 좋은 곳도 있다.
주상절리는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아니다. 푸른 제주 바다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앞의 육각형 기암괴석은, ‘으음, 신기하게 생겼네.’ 하고 처음 몇 번만 관심을 가질 뿐이니까.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면, 어쩐지 심상찮은 파도가 몰려온다면 꼭 한 번 주상절리대를 찾아보길. 그런 날의 주상절리는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 드는 사나운 맹수 같다.
철썩, 집채만한 파도가 칠 때마다 절벽을 타고 올라와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바람에 날려 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나는 도마 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횟감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파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엄청났다. 세상의 어수선함을 한 방에 정리해 버리는 압도적인 힘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도시에 살며 늘 느꼈던 ‘인간은 참 대단해’하는 생각이 순수한 소꿉장난처럼 느껴진다.
바닷바람이 제법 소슬하게 느껴질 즈음, 이번엔 주상절리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쇠소깍을 찾았다. 쇠소깍은 담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깊은 웅덩이 지형인데, 제주 낱말로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의미하고 깍은 끝을 의미한다.
바람은 여전히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모래 해변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쇠소깍의 수면은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쇠소깍의 매력은 바로 이 대비에 있다. 한순간 다른 세계로 뛰어든 것처럼 만드는 극적인 대비. 더욱이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기암괴석과 울창한 삼림은 마치 이곳을 신비한 비밀의 장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신비한 명소에 전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유난히 푸르고 투명한 쇠소깍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므로, 과거에는 이곳은 ‘용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용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에는 신성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물놀이하거나 돌을 던지는 것도 못 하게 했다는데, 지금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노 젓는 카약이나 전통 뗏목 ‘테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그동안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바다는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여정을 마무리할 장소로 거문오름을 찾았다.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이기 때문에 ‘검은 오름’이란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오름이란 단 한 차례의 분출만을 일으키고 명을 다한 화산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한 화산들의 무덤이랄까.
물론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고, 전설에 따르면 오름 역시 ‘선문대할망’의 작품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할망이다. 다만 일부러 의도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치맛자락으로 흙을 옮기다 실수로 흘린 것들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전역에는 360여 개의 수많은 오름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거문오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연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별적인 출입이 어렵고, 대신 자연환경 해설사를 따라 함께 탐방로를 걸을 수 있다.
나는 미리 전날에 오전 첫 번째 트래킹을 예약해두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서른 명의 여행객이 입구에 모여 함께 숲으로 출발했다.
입구에서부터 삼나무와 편백,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나무들의 촘촘한 잎 사이로 가느다란 빛발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숲속을 환히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연 ‘거문오름’이라 부를 만 했다.
처음 약 30분가량은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이어져 있지만, 무성히 자란 나무가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제법 서늘했다. 걷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혹여나 제주의 여느 다른 오름처럼 탁 트인 전망을 기대하고 찾았다면 거문오름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문오름 탐방로에는 숲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름의 정상조차도, ‘이곳이 정상입니다.’하는 표지판만 있을 뿐 좌우가 긴 동굴처럼 막혀있다.
하지만 신비로운 숲의 생태를 관찰하기 좋아한다면, 축축한 습기를 통해 전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을 좋아한다면 거문오름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가 된다. 지층 변화로 생긴 풍혈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천연 에어컨 역할까지 해주니 말이다. 더욱이 세상을 덮은 신록의 풍경은,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생기 있는 색인가 느끼게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에필로그
푸른색 이 길을 끝으로 첫 번째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을 마무리했다. 문자 그대로 제주도의 이야기와 자연을 따라 걷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문대할망’ 전설 중에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언젠가 제주도가 다 만들어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설문대할망은 자신이 입을 속옷을 만들기 위해 명주 100동을 모아 달라고 제주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명주 1동은 50필인데 한 필의 길이는 대략 20m나 된다. 그러니 명주 100동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 때문에 설문대할망은 보답으로 제주에서 목포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는 생기지 않았고, 제주도는 지금까지 그대로 섬으로 남아있다. 딱 99동을 모으고 하필이면 한 필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마 한 필이 부족했던 건 설문대할망이 숨겼거나 거짓말을 한 까닭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한 필이 모자를 리 있나. 아무리 전설이어도 말이다.
하여간 제주도는 발길 닿는 곳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니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제주도의 풍경이 단조롭고 밋밋함 투성이였다면 이런 전설이 먹혀들 리 없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제주도에 전설이 넘쳐 나는 건 순전히 자연 덕이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에서는, 때로는 영화 같은, 때로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태생이 그런 섬이다.
끝으로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에 어울리는 맛을 추천해 본다.
나는 사람의 기억은 오감을 통해 짙게 남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다양하게 느낄수록 그 흔적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그러니 여행에서의 음식은 이른바 ‘추억의 방부제’ 같은 거다. 말이 요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음식은 여행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추천하는 첫 번째 음식은 갈치국이다. 갈치조림은 먹어봤어도 갈치국은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있다. 지방이 많은 갈치는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갈치로 국을 끓여 먹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갈치국은 ‘가장 제주다운’ 향토 요리라 할 수 있다. 제주 앞바다에서 공수한 싱싱한 제주 은갈치에, 큼직하게 썬 호박과 얼갈이배추. 여기한 칼칼한 매운 고추가 전부인 갈치국은 그야말로 제주도 갈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제주도의 맛을 꼽는데 흑돼지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를 먹는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의례처럼 자리 잡아서, 제주도 여행을 했는데 흑돼지를 먹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야기의 완결을 내지 못한 기분이다. 불판 위에 잔뜩 졸인 멜젓에 흠뻑 담가 먹는 흑돼지. 그 맛은 말해서 무엇하리.
그래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도 의례적으로 흑돼지를 먹었다. 점심을 많이 먹은 상태였지만, 평소 같으면 양을 조절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행기를 쓰기 위함이니까.’ 하는 책임감으로 양껏 먹었다.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오겹살도 먹고 항정살까지 먹었다.
언젠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흑돼지 두루치기 하나를 건장한 학생 여럿이 나눠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 여행을 떠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